<꽃 시 모음> 문정희의 '꽃의 선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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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16-03-31 00:11 조회15,536회 댓글0건본문
<꽃 시 모음> 문정희의 '꽃의 선언' 외
+ 꽃의 선언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나의 성(性)을 사용할 것이며
국가에서 관리하거나
조상이 간섭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사상이 함부로 손을 넣지 못하게 할 것이며
누구를 계몽하거나 선전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돈으로 환산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정녕 아름답거나 착한 척도 하지 않을 것이며
도통하지 않을 것이며
그냥 내 육체를 내가 소유할 것이다
하늘 아래
시의 나라에
내가 피어 있다
(문정희·시인, 1947-)
+ 꽃 한 송이
간절하면 가 닿으리
너는 내 생각의 끝에 아슬아슬 서 있으니
열렬한 것들은 다 꽃이 되리
이 세상을 다 삼키고
이 세상 끝에 새로 핀
꽃 한 송이
(김용택·시인, 1948-)
+ 꽃의 이유
꽃이 피는 이유를
전에는 몰랐다
꽃이 필 적마다
꽃나무 전체가
작게 떠는 것도 몰랐다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누가 물어보면 어쩔까
꽃이 지는 이유도
전에는 몰랐다
꽃이 질 적마다
나무 주위에는
잠에서 깨어나는
물 젖은 바람 소리
(마종기·시인, 1939-)
+ 꽃비
꽃은 거울이다.
들여다보는 이를 비춰주지 않는 거울이다.
들여다보는 이가 다 꽃으로 보이는 이상한 거울이다.
꽃향기는 끌어당긴다.
꽃향기에 밀쳐진 경험은 한 번도 없다.
꽃은 주위를 가볍게 들어올려준다.
꽃 앞에 서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마음은 꽃에 여닫히는 자동문이다.
꽃잎을 만져보며 사람들은 말한다.
"아, 빛깔도 참 곱다."
빛깔을 만질 수 있다니,
빛깔을 만질 수도 있게 해주시다니.
사람들을 다 시인으로 만들어주는 꽃은 봄의 심지다.
(함민복·시인, 1962-)
+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시인, 1954-)
+ 꽃은 언제나 진다
나를 항복시키려고 꽃이 핀다
어떠한 권력도
어떠한 폭력도 이와 같은 얼굴을 가질 수 없어
며느리밑씻개란 어처구니없는 이름의 꽃도
내 앞에 권총을 빼들었다 총알을 장전한
꽃 앞에 이끌려 나오지 않으려고
이중 삼중 문을 닫고 커튼까지 쳤으나
몽유에 든 듯
여기가 어딘가 깨어보면
꽃에 코를 처박고 있거나
눈동자에 그득 꽃잎을 쑤셔 박고 있다 나는
이미 수형에 든 것이다
네가 꽃인 것이 죄인지
내가 사람인 것이 죄인지
쏟아진 물처럼 살아있는 것은 다 스며야한다
이 지독한 음해의 향기에
수갑 채여
꽃비 촘촘한 창살 속
애벌레처럼 둥글게 몸을 말아 바치며
나는 너를 이길 수 없어 완전히
내가 졌다고 생각할 때
꽃이 졌다
나를 항복시켰으면 너는 잘 나가야지
꽃은 언제나 져서 나를 억울하게 한다
(김종미·시인, 1957-)
+ 앙큼한 꽃
이 골목에 부쩍
싸움이 는 건
평상이 사라지고 난 뒤부터다
평상 위에 지지배배 배를 깔고 누워
숙제를 하던 아이들과
부은 다리를 쉬어가곤 하던 보험 아줌마,
국수내기 민화투를 치던 할미들이 사라져버린 뒤부터다
평상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동백 화분이 꽃을 피웠다
평상 몰아내고 주차금지 앙큼한 꽃을 피웠다
(손택수·시인, 1970-)
+ 압화壓花
매몰된 가을이 발견되었다
책을 끼고 그곳을 지나갔을 때
유난히 뺨이 붉은 꽃이 틈으로 뛰어들고
45쪽과 46쪽은 닫혔다
붉은 물을 토하며
서서히 종이처럼 얇아지는 동안
책은 책 밑에서 피를 말리고 있었다
계절이 계절을 덮치듯이
시간의 두께와 어둠에 내 기억은 갇혀 있었다
방치된 것들은 대부분 변형을 일으킨다
책갈피 사이
책의 생각과 엉겨있는 꽃의 얼굴
꽃들이 선호하는 죽음은 태어난 자리에서 치르는 풍장이다
압사壓死를 두려워하는 꽃들
한 권의 책으로도
죽일 수 있는 게 많다
(마경덕·시인, 1954-)
+ 꽃
꽃이 눈에만 보일 뿐
꽃의 소리가 안 들린다면
아직 꽃을
잘 모르는 거다.
꽃 앞에
가만히 서서
두 눈을 감고
가슴의 귀를 활짝 열면
꽃의 아름다운
겉모양 너머
보이지 않는 내면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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