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연 경력 20년이 넘는 회사원 최모(45)씨는 2년 전 기침과 가래가 심해 흉부 엑스레이를 찍었다. 거기서 큼지막한 덩어리가 오른쪽 폐에서 발견됐고, 조직 검사 결과 폐암 진단이 내려졌다. 진단 당시 폐암은 이미 뇌와 간으로 퍼져 있었다. 수술이 불가능한 전이성 말기(4기)였다. 한창나이 가장에게 황망한 일이다. 대학병원 의료진은 우선 기존 항암제를 투여했다. 별 효과는 없었다. 기침과 통증은 더욱 심해졌고, 몸은 바짝 말랐고, 거동조차 힘들었다. 의료진은 그의 여생을 6개월 정도로 봤다.
그러다 2015년 1월 신개념 암 치료제인 키트루다(Keytruda·제약사 MSD의 면역 항암제) 임상시험에 들어갔다. 최씨는 3주에 한 번씩 외래에서 키트루다 주사를 맞았다. 두 달 후 최씨의 주치의인 조병철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종양내과 교수는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다 죽어가던 최씨가 밝은 표정으로 인사하며 진료실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조 교수는 "완전히 기적이자 충격이었다"며 "예상을 뛰어넘는 면역 항암제 효과를 직접 보며 암 치료의 새 지평이 열린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현재 최씨의 폐암은 90%가 줄어든 상태고, 약물 독성 없이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면역항암제로 면역세포 軍隊 육성
기존 항암제의 암 직접 공격보다
약물 독성 적고 치료 효과 뛰어나
신개념 암 치료 면역 항암제
기존 항암제는 암을 직접 공격하는 방식이다. 암이 성장하는 회로를 차단하거나 독성으로 암세포를 죽인다. 이에 대해 영민한 암은 우회로를 만들거나 독성을 막는 장막을 쳤다. 근래 나왔던 암세포만 공격하는 표적 항암제도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내성 현상으로 약효가 줄어드는 문제를 낳고 있다.
하지만 면역 항암제는 몸속 면역세포를 활성화해 그것이 암을 공격하도록 한다. 적진을 직접 포격하는 게 아니라 군대를 키워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식이다. 면역세포 중 T세포는 암을 인지하고 공격하는 주축 군(軍)이다. 영특한 암세포는 T면역세포의 안테나 격인 PD-L1 수용체에 달라붙어 T세포가 암도 못 알아보고, 공격도 하지 않게 무력화했다.
유전체 분석으로 표적 항암제 선택
폐암이라고 해서 다 같은 폐암이 아니다. 세포 종류도 다른 데다, 폐암이 생긴 요인이 환자마다 다르다. 그 차이를 찾는 것이 유전체 분석이다. 이를 통해 알아낸 유전자 변이에 따라 환자에게 맞는 항암제를 투여하는 이른바 개인 맞춤형 정밀의학이다. 국제학술지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폐암의 경우 10명 중 6명에서 암을 일으킨 유전자 변이가 발견되고, 그 종류가 10개를 넘는다. 그만큼 암이 발생한 과정이 환자마다 다르다는 얘기다.
내 몸에 약을 맞추는 표적 항암제
유전자 변이 폐암에만 10여種
피부암·위암 항암제 써서 효과
국내에서는 성균관대 의대 삼성유전체연구소를 통해 최대 규모(약 1000명)의 유전체 변이 임상 연구가 이뤄졌다. 거의 모두 항암 치료에도 암이 계속 자라는 진행성, 여러 장기로 퍼진 전이성, 수술로 제거가 불가능한 상태의 환자들이다. 기존 방법으로는 손쓸 도리가 없는 말기 환자들인 것이다. 하지만 분석 결과, 환자의 약 20%에서 새로운 표적 항암제를 찾게 됐고, 희망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피부암 항암제가 폐암에 쓰이고, 위암 항암제가 뇌암에 쓰이는 식의 교차 사용 현상이 관찰됐다. 장기에 따른 항암제 족보가 사라지는 것이다. 박웅양 삼성유전체연구소장은 "암이 어느 장기에 발생했건 암을 일으킨 유전자 변이에 따라 항암제를 끌어다 쓰게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