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오빠들의 말년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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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가 예순의 나이에 얻어 일제의 탄압에서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던 귀한 딸 덕혜옹주.
그러나 고종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덕혜옹주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일생을 다룬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하는 이 시점. 덕혜옹주를 포함한 고종 황제 슬하 사남매(四男妹)의 마지막 모습은 어땠을까.

 

 

역사의 소용돌이


1907년 고종(高宗)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과 이상설, 이위종 등 특사(特使) 3인을 몰래 파견한다.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국권 회복을 도모하려 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한다. 이를 계기로 고종은 순종에게 강제로 양위(讓位)한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韓日合倂條約) 체결로 조선의 519년 역사는 끝난다.

고종 황제 어진(御眞)과 덕수궁 일부 모습. /조선일보DB

1919년 덕수궁에서 노년을 보내던 고종은 평소처럼 식혜를 먹은 후 돌연사한다. 향년 68세였다. 뇌출혈 또는 심장마비로 서거했다는 '자연사설'과 '자살설', 식혜에 독이 들었다는 '독살설' 등이 있지만, 아직 고종의 사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고종에게 13명의 자녀가 태어났지만, 순종과 의친왕, 영친왕, 그리고 덕혜옹주를 제외하고는 어린 나이에 모두 죽었다.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남은 4명의 자녀는 어떤 일생을 보냈을까?

순종(純宗)

본명 이척(李坧). 1874년 출생.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 슬하에 태어나 유일하게 성년이 넘도록 생존한 적자(嫡子)이다. 그러나 그도 어릴 때부터 병약했다.

1907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황제에 오른 후부터 나라를 뺏기기 전까지 3년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일제 통감(統監)의 내정간섭으로 통치자로서 무능할 수밖에 없었다.

"짐이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해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순종 3년 8월 22일 조령(詔令)이 내려진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일제)의 식민지가 된다.

사진은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강제 유학의 길에 오른 영친왕. 그리고 창덕궁 전경. /조선일보DB

한일합병조약으로 순종은 황제에서 왕(李王·이왕)으로 강등된다. 그리고 1926년 심장마비로 서거하기 전까지 창덕궁에서 지낸다.

그에게 후손은 없었고, 이왕 직위는 이복동생 영친왕에게 물려준다.

의친왕(義親王)

본명 이강(李堈). 1877년 출생. 후궁 귀인(貴人) 장씨의 소생이다.

18세 나이에 일본 보빙대사(報聘大使·답례로 외국 방문하는 대사)로 임명된 이후 영국·독일·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고, 미국에서 유학한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후부터 풍부한 국제무대 경험을 토대로 독립운동에 한평생을 보낸다.

본지 1920년 6월 30일자 지면 일부 /조선일보DB

1919년 상해임시정부로 탈출해 독립운동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만주에서 일본 경찰에 발각돼 총독부 관사에 연금(軟禁)된다. 이것이 일명 '대동단(大同團) 사건'이다.

끝까지 배일(排日) 정신을 지킨 그는 1945년 해방 후 일반인으로 살다가 6·25 전쟁 피난길에서 영양실조에 걸려 1955년 서거한다.

이건(李鍵)·이우(李鍝)를 비롯해 13남 9녀가 태어났으며, 현재까지 고종의 후손으로 대(代)를 잇고 있다.

영친왕(英親王)

본명 이은(李垠). 1897년 출생. 태비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의 소생이다.

후손이 없던 순종이 이복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하면서 종묘에 모셔진 마지막 조선의 왕족이 된다.

1907년 황태자가 되자마자 이토 히로부미에게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갔고,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거치면서 철저히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전주역사박물관에 기증된 대한제국 황실 가족 사진 중 하나. 영친왕 내외 사진. /조선일보DB

1920년 일본 황실의 내선일체(內鮮一體·일본과 조선은 한 몸) 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이방자(梨本宮方子·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사와 정략결혼한다.

일본에 붙잡혀 있는 동안 일본 육군 중장에 오른 데다, 순종 서거 후 이왕 직위도 물려받아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어머니 임종도 보지 못했고, 늘 고국을 그리워했다.

해방 직후 재산 국유화, 직위 박탈 등 황족으로서 특권이 모두 폐지됐고, 이승만 정권의 반대로 귀국이 좌절된다. 일본에서도 왕족 명단에 제외돼 '재일한국인(在日韓國人)'이라는 무국적(無國籍) 상태로 어렵게 생활한다.

이미지 크게보기1963년 11월 22일 영친왕이 볼모로 떠난 지 50년 만에 병든 몸으로 고국땅을 디뎠다. 사진은 영친왕이 탄 앰블런스와 환영하는 군중들. 그리고 같은 날, 이구씨와 이방자 여사의 기자회견. /조선일보DB

1963년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서야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해 귀국. 귀국 후 국가 보조금을 받아도 뇌 질환 치료비 때문에 가난한 생활이 계속됐고, 1970년 서거한다.

두 명의 아들 이진(李晉)과 이구(李玖)을 두었지만, 장남은 어린 나이에 죽었다.

덕혜옹주(德惠翁主)

본명 이덕혜(李德惠). 1912년 출생. 후궁 복녕당(福寧堂) 귀인 양씨의 소생이다.

고종이 늦은 나이에 얻은 막내이자 고명딸(아들 많은 집의 외딸)로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자랐다.

그러나 자신을 지켜주던 아버지를 8세 나이에 잃고, 1925년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학교를 다닌다.

1930년 몽유증과 조발성치매증(조현증)이 나타나 이복 오빠 영친왕 내외의 집에서 함께 살면서 치료를 받는다. 이듬해 병세가 호전돼 쓰시마섬(對馬島) 도주(島主)의 아들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결혼한다. 결혼 1년 만에 딸 정혜(正惠·마사에)를 얻으며 원만하게 생활한다.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가 오랜 해외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해 창덕궁 낙선재에 정착했다. /조선일보DB

하지만, 증세가 점점 심해지면서 1946년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한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영친왕 내외가 합의 이혼을 결정한다. 딸도 유서를 남긴 채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된다.

창덕궁 낙선재 일부 모습. /조선일보DB

영친왕 내외가 보살피던 덕혜옹주는 이승만 정권의 거부로 귀국하지 못하다가 1962년에 이르러 고국으로 돌아온다. 일본으로 떠난 지 38년 만이었다. 호적은 20년 후 1982년에 생긴다.

귀국 직후부터 5년 동안은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는다.

이후 어릴 적 자신을 돌보았던 유모를 다시 만나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냈으며, 1989년 서거한다. 이때까지도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고종 황제의 가족 사진. 왼쪽부터 영친왕·순종·고종·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순종 비)·덕혜옹주. /문화재청 제공

궁에서 태어나 일제의 핍박을 받으며 오랜 세월을 보낸 비운의 순종, 의친왕, 영친왕, 그리고 덕혜옹주.

그들은 해방 후에도 무관심 속에서 말년을 마친, 조선의 마지막 왕족이었다.


참고: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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