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과 망치로 백제를 살려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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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투자증권 제공 최기영 대목장이 연장을 살펴보고 있다. 그는 지난 10일의 인터뷰 때 한복을 입어달라고 부탁했더니“일할 때 입는 것도 아닌데 어색해서 못하 겠다”고 사양했다.“ 그러면 과거에 광고에 나왔을 때 찍은 사진을 쓰게라도 해달라”고 거듭 조르자, 그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충남 부여군 백마강(白馬江) 규암면 합정리 100만평에 옛 백제(百濟)가 되살아나고 있다. 1300년 전 사라진 왕궁과 사찰, 민가를 세우는 백제 역사 재현 단지다. 이 프로젝트를 총괄 지휘하는 최기영(崔基永·65) 대목장은 왕국의 골목 사이로 기자를 데리고 다니며 말했다.

"야! 나무를 더 쳐. 더 치라고. 옳지, 그만." "그거 황토야, 진흙이야? 황토 맞아?"

뭔가 보여주겠다더니 걸음을 멈추기 일쑤다. 목수들이 하는 일에 일일이 참견하기 때문이다. 그는 다 해진 검정 고무신에 빛이 바래 처음 색깔이 상상이 가지 않는 바지와 점퍼 차림이었다. 8년 전 공사를 시작하면서 사 입은 것들이라고 했다. 장인(匠人)도 징크스를 믿는가.

"그건 아냐. 원래 장인은 뭘 잘 안 버려. 익숙한 게 좋거든."
키 165㎝의 최 대목장은 목수를 한 지 48년이 됐다. 목수 이력은 그의 등에 화인(火印)처럼 남아있다. 척추가 야구공만하게 툭 튀어나와 등이 굽은 것처럼 보이는 이걸 '굳은 뼈'라 한다. 목도를 하다 보니 뼈 모양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목도는 두 사람이 짝을 지어 자재를 묶은 밧줄을 몽둥이에 꿰어 어깨에 메고 나르는 것을 말한다.

궁궐이나 사찰 같은 전통 건축의 총책임자는 도편수라고 불리며, 대목장(大木匠)은 보통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받을 정도로 실력이 있는 장인을 지칭한다. 최 대목장은 중요무형문화재 74호다. 문화재 74호는 최씨를 포함해 모두 3명이다.

그가 백제 왕궁 옆 능사(陵寺)의 5층 목탑 앞에서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고증을 거쳐서 만든 목탑인데 이렇게 좁은 1층 면적에서 39m까지 올린 것은 당시 건축 수준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려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손길 아래 고(古)건축 수백 채가 고쳐지고 되살아났다. 서울 서대문 봉원사, 경북 안동 봉정사, 경기 양평 용문사, 전남 순천 송광사, 남한산성, 창경궁, 전남 구례 문수사, 강화도 보문사…. 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공사가 바로 백제의 혼(魂)을 일으켜 세우는 이 공사다.

"8년 전에는 까맸던 머리가 하얗게 변했으면 그걸로 말 다한 거 아닌가 몰러. 히히."

―한옥이 그리 좋은 겁니까.

"들어서는 절대 모르고 한번 살아보면 알게 되지요.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합니다. 요즘 아이들 고생하는 아토피 같은 게 절대 생기지 않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집입니다. 한옥에서 먹고 자기만 해도 회춘(回春)이 됩니다. 진짜예요, 소식이 금방 와요."

―백제 역사 재현 단지가 지금까지 맡은 가장 큰 공사라고 하는데.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큰 공사입니다. 제가 이 공사를 맡은 것 자체가 대운(大運)이 터진 겁니다. 조상에게 뭔가 잘한 게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를 통틀어 이런 규모의 건축은 없을 겁니다."

―기본 계획이 1990년도에 만들어졌다지요.

"저는 JP(김종필·金鍾泌 전 자민련 총재)가 이건 확실히 남겼다고 봐요. 2010년 완공목표인데 그 공사를 삼부토건이 입찰받은 뒤 제게 맡겼어요. 건축비만 1300억원이 넘습니다."

―어떤 작업을 하는 겁니까.

"옛날 백제 땅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유물들을 100만여평에 재현하는 거지요. 왕궁, 사찰, 일반 집의 합이 184채입니다. 아직 70채를 더 지어야 해요."

―1300년도 훨씬 전에 없어진 왕국의 건축 자료가 남아있나요.

"백제 건축 중에 특이한 게 '하앙식' 기법이라는 겁니다. 화암사에 유일하게 남아 있지요. 비스듬히 아래쪽으로 늘어뜨린 나무를 이용해서 그 위에 얹은 구조물의 무게를 분산시키는 공법인데 중국 송(宋)에서 백제를 거쳐서 일본으로 갔습니다. 그게 백제 궁궐의 기초라는 근거는 있어요. 그래서 복원이 아니고 재현이라는 말을 쓴 겁니다. 설계도 만들 때 학자들과 문화재 위원들이 대거 참여했지요."

―다른 기록이 나오면 바뀔 수도 있겠네요.

"그것까지는 내가 이렇다 저렇다 얘기할 수 없는 거지요. 지금 짓는 것에 대한 판단은 후손들이 해야 합니다. 100%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공사를 하다 보면 집의 문(門)은 어떻게 했겠다, 이런 흐름은 보이지요."

―아까부터 능사의 5층 목탑에 애착을 많이 보이는 것 같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제가 제일 짓고 싶은 게 황룡사 9층 목탑입니다. 전통 건축에 대해 그나마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을 때 황룡사는 복원해야 해요."

―왜 그렇습니까.

"세계에서 제일 가는 나무 집이거든요. 9층이나 되는 목탑은 세계에 없어요. 중국에 층층을 다닥다닥 붙인 게 있지만 그건 집이 아니라 구조물이라고 봐야 합니다. 황룡사 목탑은 정상 건물입니다. 우리가 자본도 있고 인력도 있는데 황룡사를 복원 못하면 안되지요. 고고학자, 문화재 위원들이 다 힘을 합쳐야 해요. 그거 못하면 대통령도 대통령이 아닌 것이고."

―황룡사 9층 목탑이 우리나라 모든 목수들의 꿈인가요?

"목수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꿈이라고 해도 되지요. 삼성, 현대 10대 재벌 회장들이 미쳐 모르는 부분이라고 봅니다. 삼성 에버랜드에 그거 하나 세워놔 보세요. 세계에서 안 올 사람이 없을 겁니다. 지금보다 관광객들이 훨씬 더 많이 올 겁니다. 국가의 문화 유산을 일개 그룹에서 세운다는 명예는 또 얼마나 엄청난 겁니까. 20만 장인들의 숙원 사업이에요. 내가 삼성에 200명 임원 세워놓고 세 시간 특강도 했어요. 반드시 해야 합니다."

―신응수 대목장도 하고 싶다고 하셨던데요?

"거기가? 정말이에요? 언제 그랬어요?"

―책에 썼던데요.

"아니 그 양반이. 나랑 잘 지내는 사이이기는 한데, 내가 하려는 건데 그걸 건드리면 안 되는데. 할 수 없죠, 싸워야지. 내가 한마디 농반 진반 덧붙이면 황룡사 만든 사람이 백제 사람이래요. 내 고향 예산은 백제권이잖아요. 흐."

최 대목장은 계속 꿈을 얘기했다. 백제 역사를 세우는 큰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장인의 욕심은 끊이지 않는 듯했다. 말소리가 커서 인터뷰를 진행한 현장 사무소의 컨테이너 박스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100만평을 도화지 삼는, 세상에서 가장 큰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는 성에 차지 않는 듯했다. 구수한 사투리를 섞어가며 그는 세상을 평하고 건축을 평하고 사람을 평했다. 질풍노도, 그는 어떻게 이런 열정을 갖게 됐을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목수는 누구입니까.

"세계에서는 모르겠고 내가 아는 목수 중에는 우리 선생님이 최고예요. 돌아가신 김덕희 선생님 밑에서 내가 배웠어요. 일제 시대 때 일본의 유명한 목수가 한국 제1의 대목장을 골랐는데, 바로 김 선생님이셨지요. 그 아래 김중희 선생님도 있는데 두 분은 형제이자 사제였어요. 두 분 고향이 경북 문경인데 나중에 충남 예산 수덕사 아래로 이사왔어요. 옛날에는 대웅전 하나 복원에 5년, 10년 걸리니까요. 대목들은 근거지가 없어요. 한 군데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니까."

―언제 김 선생 밑으로 들어갔나요.

"1960년도, 열일곱에 들어갔어요."

―목수 일이 좋았습니까.

"먹고 사는 길이 그것뿐이었지요. 전쟁 직후여서 소나무 껍질을 밀가루 죽에 넣어서 먹던 때였습니다. 목수일 하면서 세 끼 밥 먹는 것만 해도 천만다행으로 여기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는 1000명이면 1000명 다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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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일 충남 부여 백제 역사 재현 단지 앞에 서 있는 최기영 대목장. 공사를 시작했을 때 새까맸던 머리가 하얘졌다고 말했다./최기영 대목장의 등 위쪽은 오랜 목수 생활 영향으로 튀어 나와 있다. 그는 이것을‘굳은 뼈’라고 불렀다.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해보니 좋던가요?

"운동선수도 그렇고 깡패도 그렇듯이 끼라는 게 있어야 해요. 하기 싫은 거 할 수는 없잖아요. 하다 보니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생 굶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목수 하기 전까지 제가 못되게 살았어요. 태권도 했다고 까불대기도 했고 15살부터 가설극장 갖고 4~5군데 왔다 갔다 하면서 사업을 하기도 했지요. 포장 치고 연사(演士)가 말하고 필름 돌리는 극장이 뭔지 압니까?"

―그 길로 계속 갔으면 사업가가 됐겠네요.

"생각해 보니 사람 망칠 노릇이더군요. 길게 해야 사람 구실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다니던 서당을 통해 선생님을 소개받은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이른 나이에 집을 나가셨나요?

"제 고향이 충남 예산입니다. 수덕사 밑이었어요. 아버지가 제가 일곱 살 때 돌아가셨어요. 의부(義父) 밑에서 자랐지요."

―어머니가 재가했고 배다른 동생이 생긴 영향이 있었겠군요.

"철이 좀 일찍 든 건 사실입니다. 이 눈치 저 눈치 봐야 하니까요. 우리 의부가 성인군자였어요. 당신 아들보다 저를 더 중히 여겼지요. 그런 걸 고마워할 줄 모르면 짐승이지요."

―목수가 되면 뭐부터 배웁니까.

"선배 목수들 심부름해 주고 연장 가는 것을 배우지요. 목도도 하고 지게도 집니다. 요새 젊은이들이 그 광경을 보면 당장 때려치울 겁니다. 그렇게 피를 토하고 뼈를 깎는 노력이 없으면 지금까지 올 수 없었겠지요."

―기술도 가르쳐 줍니까.

"길만 보여주는 식입니다. 나머지는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요. 한 가지를 배우면 계속 연습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나서 다음 단계로 가고, 이런 게 기능인입니다. 그 뒤로는 요새 말로 공사 따올 능력도 배워야 합니다."

―영업 방법을 배운다는 겁니까.

"신뢰성을 가르친다는 겁니다. 똑같은 금액의 집을 남보다 잘 짓고 정확하게 약속을 지켜주는 장인은 신경 쓸 게 없어요. 이걸 배워야지요."

―자립은 금방 하셨잖아요?

"5년 선생님한테 배우고 무턱대고 자립했어요. 기능은 스승이 가진 기능을 다 소화할 수 있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는 겁니다. 스승의 모든 것을 다 뺏어야지요. 힘으로 빼는 것이 아니고 스승보다 더 위에 서야지요."

―언제쯤 자리를 잡으신 거예요?

"20년쯤 했을 때나 돼서 잡혔습니다. 처음부터 무슨 이득을 내겠어요. 공사해 봐야 밑지는 거지요. 그 덕에 도망도 많이 다녔어요. 전통 집 공사는 아니고 일반 주택 공사를 맡은 적이 있었어요. 처음 하청받은 사람이 몰래 이민 갔어요. 따라서 저도 망했지요. 빚 얻고 둘이 동업하다가 자재 살 돈도 떨어지고 해서 집을 다 못 지어준 채 그냥 도망갔습니다."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교훈이 됐지요. 다른 사람과 똑같이 하면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남이 7시간 자면 저는 5시간 자고, 머리를 놀려서는 안 되지요. 저녁에도 다음날 할 일을 생각해야지 그냥 자면 안 됩니다. 그런가 하면 미련을 깨끗이 지울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니다 싶으면 즉시 머릿속에서 지워야지요."

―그게 마음대로 됩니까.

"노력하면 100%는 안 돼도 90%는 됩니다. 장인들이 대개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잖아요. 그러니 무식한 대신 남들보다 지독한 게 있어야지요. 나중에 정부에서 학사학위 받고 지금은 대학 강의도 하지만 제 지식은 독학한 것입니다. 독한 덕분에 이 정도 이뤘겠지요."

문화재청에 따르면, 대목장 기문(技門)은 조원재·이광규 기문이 신응수 대목장으로 내려가고 있고, 김덕희·김중희 기문이 최기영과 전흥수 대목장으로 내려가고 있다. 기문이란 기술로 만들어진 가문이라는 뜻이다.

기문에서 대목장은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 현재 살아있는 세 명의 대목장 중에서 신응수 대목장은 1991년에 문화재가 됐지만, 최기영 대목장은 전흥수 대목장과 함께 2000년에야 됐다.

―기문의 경쟁이 있던데, 왜 늦게 문화재가 된 건가요?

"경쟁이 있어요. 대목은 장인 중에서도 심해. 우리 문도(門徒)는 사찰 건축에 강한 편이에요. 근데 스승님이 무형 문화재는 아니었어요. 그걸 사기라고 생각하셨어요. 1968년인가 1969년인가, 내가 기능자 목공 자격증을 한국에서 두 번째인가 세 번째인가 따서 보여드렸더니 그 자리에서 박박 찢으셨어요. 다 사기라고. 다른 문도 스승들은 일찍 무형문화재가 됐잖아요. 그런 문도는 먼저 융성하고 성행했어요. 우리는 사찰에서 맛있는 밥이나 먹다 보니까, 노력도 적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요. 분명한 것은 우리 문도도 분명 수백 년 내려왔다는 겁니다."

―기문의 수제자이셨나요?

"우리 문도에는 스승님 가족들이 아주 많았어요. 그만큼 경쟁자도 많았죠. 근데 결국 내가 잇는 셈이죠. 문화재가 됐으니까요."

―문도의 차이가 커요?

"문화재가 된다든지 30년 이상 했다든지 하면 할 건 다 해요. 맛이 좀 어렴풋이 다를 뿐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사찰을 많이 했고 신응수씨 쪽은 궁궐을 많이 했어요."

―개인의 집을 지어준 적도 있지 않나요?

"어유, 많아요. 그거 해야 돈이 되지요."

―전통 건축을 하다 보면 설계자와는 많이 싸운다고 하더군요.

"전통 건축은 반은 예능이고 반은 기능이에요. 골조는 100% 정확하게 정해진 대로 할 수 있습니다. 조경이나 지붕 높낮이나 집의 규격은 예술적인 감각이 필요해요. 지붕의 휘어진 정도나 서까래의 각도 같은 것은 집의 크기, 지역에 따라 다 다르니까요. 이걸 설계도 그리는 사람은 모르니까 싸우게 됩니다. 설계도에 다 표현할 수가 없어요. 장인들이 보기에 어떤 도면은 그건 그냥 그림에 불과해요. 한옥 만들다 보면 집주인과 권투를 하기도 하죠."

―집주인들뿐 아니라 공무원들하고도 많이 싸웠을 것 같네요.

"내 별명이 '깡패 문화재'입니다. 어떤 설계는 형편없으니까 정정해야 하는데 사업소 소장이나 공무원들이 안 된다는 거예요. 각목으로 맞아도 상관없다 생각하고 막 해대지요. 욕쟁이 영감이라고 할 겁니다."

경쟁은 하지만 대목장들이 모두 힘을 합쳐야 하는 일이 하나 있다. 숭례문 복원이다. 한 노숙자의 어처구니없는 불만이 600년 내려온 국보 1호를 깡그리 불태운 뒤 국민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국내를 대표하는 3대 대목장에게 쏠렸다.

그런 느낌을 받았을까, 백제 역사 재현 공사 현장 곳곳에는 소화기가 배치돼 있었다. 현장 입구에는 '2008년 2월 10일 숭례문을 잊지 말자'는 플래카드도 걸려 있었다. 이 글귀가 기자에게는 화재를 조심하자는 뜻과 문화재를 아끼자는 중의법(重義法)처럼 보였다.

―숭례문 복원은 어떻게 돼 가나요?

"숭례문 복원은 대목장 한 명한테 줘서는 안 되는 일이에요. 그 화재는 소중한 국보를 장인들이 잘 만들어 국가 관리자들에게 맡겼더니 다 태워 버린 거죠. 그걸 복원해야 하는데 머리가 터질 거 같습니다. 대목장들도 대패질하면서 일을 하는 과정을 전 대한민국 국민이 다 볼 수 있게 하자, 영상 필름을 남기자, 이런 주장을 내가 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영리 목적을 떠나서 숭례문을 다시 만들 수 있는 겁니다. 신응수 선생, 전흥수 선생도, 나도 심부름부터 하자는 거예요. 하나 덧붙이자면, 내 21대조 할아버지에 최유경 이라는 분이 계신데, 이분이 숭례문을 만든 분 중 하납니다. 기록에도 나와요."

―마땅한 나무는 찾았나요?

"대목장 세 명의 제자들이 1차 조사를 했어요. 앞으로 2차, 3차 해야죠. 나도 대패질할 겁니다. 멋있게 깨끗하게 복원해야죠."

―복원에 몇 년이나 걸릴까요?

"조사를 해서 설계가 나오면 측정해서 공사하는데 수년은 걸릴 겁니다. 제일 좋은 금강송 골라다가 건조도 잘 해야 하고. 건조만 제대로 하려고 해도 몇 년 걸리니까요."

―지금까지 최고 작품은 뭐예요?

"내가 죽을 때 짓는 작품일 겁니다. 장인의 실력은 해가 묵고 갈수록 좋아지거든요. 작년에 지은 집보다 올해 지은 집이 더 좋은 것은 당연하죠."

그는 경기도 남양주에 중요무형문화재 대목장 전수 교육관을 만들어 놓고 있다. 후배를 키우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수십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다. 아들도 제자다.

3남매의 막내이자 장남인 최인혁(35)씨는 한림대 생물학과를 다니고 다른 대학 의대로 편입하려고 준비하다 약 10년 전부터는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인혁씨는 "언젠가부터 아버지도 나이 들어 보이시고 해서 돕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많이 따라다녀 고건축의 전경에 익숙하다"고 했다.

그는 다른 목수일도 배우지만 전통문화를 알리고 체계화하는 일에도 관심이 있다고 했다. 최인혁씨가 아버지 최기영처럼 스승의 가족보다 더 열심히 하는 제자에게 밀릴지, 아니면 기문을 이을지는 알 수 없다.

―왜 처음부터 목수 일을 시키시지 그랬나요?

"기자 양반, 아이 있습니까?"

―네.

"마음대로 됩디까?"

―아니요.

"나도 그랬어요. 근데 나중에 애가 하겠다고 했을 때는 솔직히 기분 째지더라고요. 흐흐. 그거 참 기분 좋아요."


최기영은 1944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1960년부터 목수 일을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는 전통 건축물을 살펴보려는 욕심에 덕수궁 담도 숱하게 넘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수백 채의 전통 집을 지었고 사찰 공사를 많이 했다. 2000년에는 중요무형 문화재 74호로 지정됐다. 현재 백제 역사 재현 단지뿐 아니라 경주의 월정교 복원도 맡고 있다. 황룡사 9층 목탑도 자기 손으로 복원하고 싶은 것이 그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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