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투병 소설가 최인호 “글쟁이 50년 폼잡았지만 사실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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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3-02-26 16:37 조회2,796회 댓글0건본문
▲ 작가 최인호 씨는 암에 걸리기 전과 똑같이 생활한다. 삶을 소진하는 고통의 축제 속에서 소설을 완성한 그는 “글이 뭔지 알게 돼서 제일 행복하다”고 말한다
작가 최인호(68)는 한국불교를 중흥한 경허 선사와 그 제자들을 그린 소설 ‘길 없는 길’을 쓰면서 불교에 심취해 1990년대 초 전국의 절을 돌아다녔다. 알고 지내던 무법 스님의 승복을 걸치고 밀짚모자를 쓴 채 화려한 압구정동의 밤거리를 활보하기도 했다. “승복으로 갈아입자 세상과 절연하고 무소의 뿔처럼 유아독존이 되어 홀로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며칠 뒤 최인호는 법정 스님(1932∼2010)을 만났다가 “며칠 전 승복을 빌려 입고 밤거리를 걸었습니다”라고 털어놨다. “그래 기분이 어떻던가요?” 법정 스님이 웃으며 물었다. “스님께서 효봉 스님(법정 스님의 은사)으로부터 출가를 허락받았을 때 느끼셨다던 그 환희심을 느꼈습니다.” 최인호가 웃었다.
“그럼 이 기회에 머리 깎고 출가하시지요.” 스님이 넌지시 말을 건네자 작가의 답은 이랬다. “저야 저의 가정이 바로 산문(山門)이지요. 아내가 바로 저의 효봉 스님이고, 저야 늦깎이 햇중이지요. 그러니 머리는 이미 깎은 셈이지요.” “허허허, 하기야 최 선생은 재속거사(在俗居士)이시니까.” 법정 스님이 웃고 최인호도 따라 웃었다.
시간이 흘러 2003년 봄. 둘은 다시 만났다. 최인호가 죽음에 관해 묻자 법정 스님이 답했다. “죽음을 인생의 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죽음 앞에서 두려워한다면 지금까지의 삶이 소홀했던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나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다시 10년이 흘러 2013년. 봄의 기운이 움트는 이 계절에 최인호가 산문집 ‘인생’(여백)을 펴냈다. 2008년 5월 침샘암 수술을 받은 뒤 5년여의 투병 기간에 틈틈이 쓴 글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가 지난해 5개월간 천주교 서울대교구 ‘서울주보’에 연재한 글과 각종 산문을 모았다. ‘생(生)은 신이 우리에게 내린 명령(命令) 그래서 생명(生命)’이란 짧은 글로 시작하는 이 책에서는 그가 투병 이후 느낀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법정 스님과의 몇 번의 인연. 스님은 2010년 3월 11일 입적했고, 작가는 암 투병 중이다. 작가는 다시 스님을 떠올린다. “법정 스님은 자신의 말대로 새로운 삶의 시작을 위해 육신의 껍질을 벗었다. 동시에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세상, 그것이 우리의 일상사인 것이다.”
작가는 다큐멘터리 ‘울지 마 톤즈’로 유명한 이태석 신부(1962∼2010)와의 일화도 들려준다. 4차 항암치료를 위해 2010년 1월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했을 때 옆 병실에 입원해 있던 이 신부를 만났다. 반가운 만남도 잠시, 얼마 뒤 이 신부가 퇴원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끝인가 봐요”라는 이 신부 누이의 울먹임을 들은 뒤였다. 작가는 신부를 찾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서로를 껴안았다. 얼마 뒤 신부의 선종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가 함께 나눈 짧은 포옹은 생과 사가 교차하는, 지상과 하늘나라가 연결되는 찬란한 동산에서 나눈 날카로운 첫 키스와 같은 것이니. 신부님, 나의 이태석 신부님, 이 가엾은 죄인을 위해 우리 주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최인호는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이 청한 점심식사 자리를 마다한 게 두고두고 마음의 짐으로 남았다. 김 추기경과 함께하는 자리가 있었으나 작가는 신문 연재 때문에 “바쁘다”며 자리를 떠야했다. 김 추기경은 “왜 함께 식사를 하지 그래”라며 못내 아쉬워했다. “요즘 나는 내 서재 벽 앞에 김수환 추기경님의 초상을 내걸고 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언젠가 천상의 식탁에서 그분과 함께 지상에서 미뤘던 점심식사를 하게 될 것을 나는 믿는다.”
암에 걸리기 전까지 수술대에 누운 것은 포경수술을 할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꼽을 정도로 건강했다는 작가는 투병 이후 많은 것을 새로 보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환자로 병원을 출입하게 되니 아아, 세상에는 참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 나는 글쟁이로서 지금까지 뭔가 아는 척 떠들고 글을 쓰고 도통한 척 폼을 잡았지만 한갓 공염불을 외우는 앵무새에 불과했구나.”
작가는 병을 앓는 환자들에게 이렇게 힘을 보탠다.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를 죽일 병은 없습니다. … 우리를 죽이는 것은 육체를 강한 무기로 삼고 있는 악입니다. 절망, 쾌락, 폭력, 중독, 부패, 전쟁, 탐욕, 거짓과 같은 어둠이 우리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한꺼번에 죽이는 것입니다.”
서울고 2학년 때인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최인호는 올해 등단 50주년을 맞았다. 반세기 동안의 작가 인생을 기념하는 문집인 탓에 ‘인생’이란 제목도 달았다. 까까머리 고교생 작가에서 반백의 노(老)작가가 된 그는 머리글에 이렇게 적으며 머리를 숙였다. “그동안 명색이 작가랍시고 거들먹거리고 지냈음이 느껴져 부끄럽다.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죄한다.”
작가는 이 책을 출간한 뒤 홀연히 길을 떠났다고 한다. 주위에 “피정(避靜·가톨릭 신자들의 수련생활)을 떠나겠다”는 말을 남긴 뒤였다. 그는 머리글을 이렇게 맺었다.
“올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어서 어서 꽃 피는 춘삼월이 왔으면 좋겠다. 혹여나 이 책을 읽다가 공감을 느끼면 마음속으로 따뜻한 숨결을 보내주셨으면 한다. 그 숨결들이 모여 내 가슴에 꽃을 피울 것이다.”
작가 최인호(68)는 한국불교를 중흥한 경허 선사와 그 제자들을 그린 소설 ‘길 없는 길’을 쓰면서 불교에 심취해 1990년대 초 전국의 절을 돌아다녔다. 알고 지내던 무법 스님의 승복을 걸치고 밀짚모자를 쓴 채 화려한 압구정동의 밤거리를 활보하기도 했다. “승복으로 갈아입자 세상과 절연하고 무소의 뿔처럼 유아독존이 되어 홀로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며칠 뒤 최인호는 법정 스님(1932∼2010)을 만났다가 “며칠 전 승복을 빌려 입고 밤거리를 걸었습니다”라고 털어놨다. “그래 기분이 어떻던가요?” 법정 스님이 웃으며 물었다. “스님께서 효봉 스님(법정 스님의 은사)으로부터 출가를 허락받았을 때 느끼셨다던 그 환희심을 느꼈습니다.” 최인호가 웃었다.
“그럼 이 기회에 머리 깎고 출가하시지요.” 스님이 넌지시 말을 건네자 작가의 답은 이랬다. “저야 저의 가정이 바로 산문(山門)이지요. 아내가 바로 저의 효봉 스님이고, 저야 늦깎이 햇중이지요. 그러니 머리는 이미 깎은 셈이지요.” “허허허, 하기야 최 선생은 재속거사(在俗居士)이시니까.” 법정 스님이 웃고 최인호도 따라 웃었다.
시간이 흘러 2003년 봄. 둘은 다시 만났다. 최인호가 죽음에 관해 묻자 법정 스님이 답했다. “죽음을 인생의 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죽음 앞에서 두려워한다면 지금까지의 삶이 소홀했던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나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다시 10년이 흘러 2013년. 봄의 기운이 움트는 이 계절에 최인호가 산문집 ‘인생’(여백)을 펴냈다. 2008년 5월 침샘암 수술을 받은 뒤 5년여의 투병 기간에 틈틈이 쓴 글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가 지난해 5개월간 천주교 서울대교구 ‘서울주보’에 연재한 글과 각종 산문을 모았다. ‘생(生)은 신이 우리에게 내린 명령(命令) 그래서 생명(生命)’이란 짧은 글로 시작하는 이 책에서는 그가 투병 이후 느낀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법정 스님과의 몇 번의 인연. 스님은 2010년 3월 11일 입적했고, 작가는 암 투병 중이다. 작가는 다시 스님을 떠올린다. “법정 스님은 자신의 말대로 새로운 삶의 시작을 위해 육신의 껍질을 벗었다. 동시에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세상, 그것이 우리의 일상사인 것이다.”
작가는 다큐멘터리 ‘울지 마 톤즈’로 유명한 이태석 신부(1962∼2010)와의 일화도 들려준다. 4차 항암치료를 위해 2010년 1월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했을 때 옆 병실에 입원해 있던 이 신부를 만났다. 반가운 만남도 잠시, 얼마 뒤 이 신부가 퇴원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끝인가 봐요”라는 이 신부 누이의 울먹임을 들은 뒤였다. 작가는 신부를 찾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서로를 껴안았다. 얼마 뒤 신부의 선종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가 함께 나눈 짧은 포옹은 생과 사가 교차하는, 지상과 하늘나라가 연결되는 찬란한 동산에서 나눈 날카로운 첫 키스와 같은 것이니. 신부님, 나의 이태석 신부님, 이 가엾은 죄인을 위해 우리 주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최인호는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이 청한 점심식사 자리를 마다한 게 두고두고 마음의 짐으로 남았다. 김 추기경과 함께하는 자리가 있었으나 작가는 신문 연재 때문에 “바쁘다”며 자리를 떠야했다. 김 추기경은 “왜 함께 식사를 하지 그래”라며 못내 아쉬워했다. “요즘 나는 내 서재 벽 앞에 김수환 추기경님의 초상을 내걸고 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언젠가 천상의 식탁에서 그분과 함께 지상에서 미뤘던 점심식사를 하게 될 것을 나는 믿는다.”
암에 걸리기 전까지 수술대에 누운 것은 포경수술을 할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꼽을 정도로 건강했다는 작가는 투병 이후 많은 것을 새로 보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환자로 병원을 출입하게 되니 아아, 세상에는 참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 나는 글쟁이로서 지금까지 뭔가 아는 척 떠들고 글을 쓰고 도통한 척 폼을 잡았지만 한갓 공염불을 외우는 앵무새에 불과했구나.”
작가는 병을 앓는 환자들에게 이렇게 힘을 보탠다.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를 죽일 병은 없습니다. … 우리를 죽이는 것은 육체를 강한 무기로 삼고 있는 악입니다. 절망, 쾌락, 폭력, 중독, 부패, 전쟁, 탐욕, 거짓과 같은 어둠이 우리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한꺼번에 죽이는 것입니다.”
서울고 2학년 때인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최인호는 올해 등단 50주년을 맞았다. 반세기 동안의 작가 인생을 기념하는 문집인 탓에 ‘인생’이란 제목도 달았다. 까까머리 고교생 작가에서 반백의 노(老)작가가 된 그는 머리글에 이렇게 적으며 머리를 숙였다. “그동안 명색이 작가랍시고 거들먹거리고 지냈음이 느껴져 부끄럽다.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죄한다.”
작가는 이 책을 출간한 뒤 홀연히 길을 떠났다고 한다. 주위에 “피정(避靜·가톨릭 신자들의 수련생활)을 떠나겠다”는 말을 남긴 뒤였다. 그는 머리글을 이렇게 맺었다.
“올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어서 어서 꽃 피는 춘삼월이 왔으면 좋겠다. 혹여나 이 책을 읽다가 공감을 느끼면 마음속으로 따뜻한 숨결을 보내주셨으면 한다. 그 숨결들이 모여 내 가슴에 꽃을 피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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