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때문에 눈물 훔치던 소년 40대에 하늘 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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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0-01-17 14:49 조회4,41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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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타항공그룹 이상직 회장
증권맨으로 출발 37세에 상장기업 인수, 6년 만에 14개 자회사 거느려
소년의 집은 가난했다. 한때 번창했던 아버지의 나전칠기 사업은 기운 지 오래. 경영을 맡은 큰형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소년의 학비는 요구르트 배달을 하던 누나와 학교 선생님이던 작은 형이 번갈아가며 대줬다. 큰형은 숙식을 부담했다. 용돈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명문 전주고를 나왔지만 소년은 늘 궁핍했다. 자존심이 강했던 소년은 그런 현실이 싫었다.
증권맨으로 출발 37세에 상장기업 인수, 6년 만에 14개 자회사 거느려
소년의 집은 가난했다. 한때 번창했던 아버지의 나전칠기 사업은 기운 지 오래. 경영을 맡은 큰형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소년의 학비는 요구르트 배달을 하던 누나와 학교 선생님이던 작은 형이 번갈아가며 대줬다. 큰형은 숙식을 부담했다. 용돈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명문 전주고를 나왔지만 소년은 늘 궁핍했다. 자존심이 강했던 소년은 그런 현실이 싫었다.
“가난한 사람은 다 가난한 이유가 있는 거야.” 친했던 한 선배가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대학생(동국대 경영학과)이 된 소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라면값이 없을 땐 친구들에게 밥 얻어먹기가 부끄러워 학교를 빼먹던 그였다. 가난이 싫어서 가출도 했었다. ‘먹기 위해’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전전했던 그에게 선배의 말은 ‘가난은 대물림 된다’는 충격적인 얘기로 들렸다.
‘죽어라 아르바이트를 해서 살고 있는데 앞으로도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니. 그럼,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는 속울음을 쏟아내며 그날 밤을 하얗게 새웠다. 밤 새워 고민해도 선배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더 이상 가난하게 살지 않겠다”
그는 그날밤 인생의 목표를 새로 세웠다. ‘전공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분야로 나가리라. 그래서 쓰러진 가업을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 20년 뒤의 목표까지 구체적으로 세운 그는 대학 졸업 후 현대증권에 입사, 이름을 날리는 증권분석가가 됐다. 1990년대 IT붐을 맞아 증시에 투자한 돈을 수십 배로 불렸으며 37세의 나이에 상장기업(케이아이씨·플랜트 제조)을 인수한 뒤 6년 만에 회사 규모를 10배로 키웠다. 그가 2007년 10월 저비용항공(low cost carrier)사업에 진출, 2009년 1월 7일 김포~제주행 첫 비행기를 띄웠다. 이렇게 날기 시작한 ‘이스타항공’은 2009년 12월 말레이시아 쿠칭과 일본 고치에 부정기 국제선을 취항시켰고 정확히 1년 만인 2010년 1월 7일 탑승객 100만명을 돌파했다.
“더 이상 가난하게 살지 않겠다”며 주먹으로 눈물을 닦던 소년은 이제 케이아이씨, 삼양감속기(엘리베이터 동력전달기기 제조), 현대종합기계(압력분사기기 제작), 동명통산(자동차 고무부품 제조), 새만금관광개발(부동산개발), 이스타투자자문, 이스타벤처투자, 이스타항공 등 14개 회사를 이끄는 중견 그룹의 회장이 됐다. 이스타항공그룹 이상직(46) 회장은 “2020년까지 매출 10조원, 순익 1조원을 달성, 20대 기업으로 진입하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족쇄
이상직 회장을 만난 것은 지난 1월 4일. 이날은 ‘103년 만에 처음’이란 폭설이 쏟아진 날이었다. 항공사로서는 오래 기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날, 그를 만난 시각은 한창 붐빌 때인 오후 3시. 하지만 본사가 있는 서울 여의도엔 쏟아진 눈폭탄 때문에 택시 한 대 오가지 않는 기이한 풍경이 벌어졌다.
“서설(瑞雪)이죠. 새해 새 업무를 시작한 첫날 서설이 내렸고 이렇게 인터뷰를 하게 됐으니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있을 겁니다.” 이 회장은 103년 만의 천재(天災)를 상서로운 눈으로 해석하며 싱긋 웃었다. 그는 각진 네모꼴 얼굴에 우뚝 선 콧날을 갖고 있었다. 말투는 느리고 어눌했다. 한눈에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느닷없이 코끼리 얘기를 꺼냈다.
“인도에선 아기 코끼리를 길들일 때 한쪽 발에 족쇄를 채웁니다. 아기 코끼리는 족쇄로부터 벗어나려고 온 힘을 다해 버둥거립니다. 하지만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포기하고 말지요. 그런데 그 코끼리가 성장해 어른이 되면 충분히 족쇄를 부숴버릴 수 있는 힘을 갖습니다. 하지만 ‘족쇄를 벗을 수 없다’는 어렸을 때의 기억 때문에 족쇄를 깨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됩니다. 주인이 주는 건초와 땅콩을 얻어먹으며 대여섯 평밖에 안 되는 공간에서 평생을 보내고 마는 거지요. 심지어 불이 나더라도 코끼리는 족쇄를 부수지 못하고 슬프게 울면서 타죽고 맙니다. 이 코끼리의 운명은 뭘까요. 결국 코끼리의 마음 아닐까요. ‘족쇄를 벗을 수 없다’는 코끼리의 마음이 평생 굴욕적인 삶을 살게 만든 것입니다.”
이 회장은 “인생의 가장 큰 장애물은 부정적인 마음”이라고 했다. ‘난 할 수 없어’란 마음이 스스로의 족쇄가 돼서 성공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처음엔 누구나 아기 코끼리 같습니다. 벗어나려고 수없이 시도하고, 수없이 실패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패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공으로 가는 길은 의외로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성공을 예측하고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이 회장은 “현대그룹 창업자인 정주영 회장을 존경한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89년 그는 평소의 ‘로망’이던 현대그룹에 지원서를 제출, 제1지망으로 현대증권을 택했다. 동기 2000명 중 20명이 현대증권에 입사했다. “경제적으로 쇠락한 집안에서 모든 것을 해야 할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정한 목표에 가장 빨리 오르는 길은 금융시스템을 배우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당시 증권시장은 주가지수 1000포인트를 찍으며 호황을 달리고 있었다. 억대 연봉자가 속출하면서 ‘1등 신랑감’으로 증권맨이 꼽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신출내기 증권맨에겐 먼 이야기였다. 영업부에 배속된 이 회장은 선배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며 투자 관련 공부를 기초부터 새로 시작했다. 그렇게 내공을 쌓은 뒤 ‘베팅’했다. 증권맨들에게 허용된 근로자주식저축 계좌를 개설한 것이었다.
“증권사 직원들은 주식투자를 하지 못하도록 금지돼 있잖습니까. 그런데 당시 근로자주식저축은 증권맨들도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1300만원을 갖고 투자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2년 뒤에 보니 계좌에 2억원이 들어있는 거예요. 수익률 1540%를 낸 거죠.”
이 회장은 “그때 복리의 개념을 알게 됐다”고 했다. “예를 들어 1년에 2배씩 10년간 수익을 낸다면 단리의 개념이죠. 하지만 복리로 따지면 첫 1년엔 2배로 동일하지만 2년째엔 4배, 3년차엔 8배, 4년 뒤엔 무려 16배로 차이가 벌어지지 않습니까. 이 개념을 적용하면 10배의 성장을 이루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됐습니다.”
워렌 버핏에게 길을 묻다
이 회장은 이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또 다른 승부수를 던졌다. 당시는 유명한 벤처붐이 일던 1990년대 말. 이 회장이 선택한 종목은 벤처의 대명사라 할 만한 ‘엔씨소프트’와 ‘다음’이었다. 벤처 주식으로 “평균 10배가량의 순익을 냈다”는 이 회장은 이렇게 장만한 10배의 이익금으로 ‘프리코스닥’ 종목에 투자했다. 프리코스닥 역시 근로자주식저축과 마찬가지로 증권맨들에게 거래가 허용되었다. 이 회장은 20개 회사에 투자, 그중 2곳에서 또 한 번의 이익을 거뒀다. 그는 어떻게 투자 대상을 족집게처럼 고를 수 있었을까.
“워렌 버핏입니다. 그분이 제 마음속의 ‘현인’이에요. 그분을 만나진 못했지만 그분으로부터 투자 철학을 배웠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했어요. ‘시장의 흐름을 예측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게다가 수급을 예측하며 다른 투자자들의 심리까지 읽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라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모든 주식 뒤엔 회사라는 실체가 있다’는 겁니다. 주식은 그냥 종잇조각이 아니라는 간단한 논리죠. 다시 말해 ‘증시가 없어도 그 회사 주식을 사겠느냐고 물었을 때 사겠다는 대답이 나올 경우엔 그 회사 주식을 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회장은 “버핏의 철학을 배운 뒤 기업의 순자산가치를 우선 순위에 두게 됐다”고 했다. “주식을 사는 것은 그 회사를 사는 것이란 확고한 가치관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 시장을 바라보니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개인이나 시장의 심리에 휘둘리지 않게 되더군요. 그렇게 하니까 투자 기법과 투자 마인드가 안정을 찾게 됐고 이는 자연스럽게 장기투자로 이어졌습니다.”
이 회장은 이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2001년 ‘㈜케이아이씨’란 플랜트 전문회사를 인수했다. 이 회사는 제철이나 석유화학 플랜트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상장기업이다. 이 회사 대표이사를 맡았던 그는 회사 규모를 10배로 키워 2007년 8월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두 달 뒤인 그해 10월 ‘이스타항공’을 설립해 항공산업에 뛰어들었다.
10년 뒤 동양최대 항공사를 꿈꾼다
“왜 생소한 분야에 뛰어들었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정 분야가 성장할 것이란 판단이 들면, 저는 덤벼듭니다. 익숙한 분야냐 아니냐 하는 것보다 전체적인 트렌드가 어느 분야로 가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결정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리더는 책임지겠다는 의지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리더 자리를 내놔야 합니다.” 이 회장이 말을 이었다. “독과점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기존의 대형 항공사들은 이미 포화상태입니다. 서비스·관광수요가 늘면 늘수록 트렌드는 저비용항공사가 될 것입니다. 외국의 경우를 봐도 그렇습니다. 미국, 유럽 모두 저비용항공사가 주요 시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동북아시아는 전체 동양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엔 당시 제주항공(2006년 취항)과 한성항공(2008년 운항중단) 외엔 저비용항공이 없었어요. 그래서 투자를 결심했습니다.”
이 회장은 프로펠러기가 주를 이뤘던 저비용항공 시장에 과감하게 보잉737기를 도입했다. 자동항법장치를 갖춘 신기종이었다. “항공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입니다. 사실 프로펠러기가 반드시 덜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는데, 바람이 불면 롤링(rolling)이 심해서 사람들이 의외로 불안해 하더라고요. 그래서 보잉737을 도입했습니다. 승무원 유니폼은 서울 동대문 시장에서 주문제작했습니다. 비용을 조금이라도 줄여서 보다 싼값에 항공티켓을 판매하려 한 것입니다.”
이스타항공 김포~제주 간 가장 싼 요금은 편도 1만9900원. 요금체계는 8단계로 다양하지만 가장 비싼 것도 6만9900원에 불과하다. 이 회장은 여기에 아이디어 하나를 추가했다. ‘추억’을 선물하자는 것이었다.
“우리 회사의 각 항공기마다 스카이, 우주선, 어린왕자, 크루즈, 타임머신 등의 별명을 붙이고 그에 맞는 인테리어를 갖췄습니다. 예를 들어 스카이호의 천장엔 하늘과 구름이 그려져 있고 어린왕자호엔 칼을 찬 어린왕자가 승객을 향해 웃고 있습니다. 우주선호를 타시면 스페이스 셔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죠. 그리고 승무원이 승객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어드립니다. 승객들은 이스타항공을 타실 때마다 ‘새롭다, 재미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비행 자체가 추억이 되는 거죠.”
독특한 서비스와 파격적인 가격의 결과는 수치로 나타났다. 2009년 1월 7일 김포~제주 노선에 취항한 지 정확히 1년 만인 지난 1월 7일 탑승객 100만명을 돌파한 것이다. “항공 산업은 초기투자가 많이 듭니다. 항공기를 마련하고, 사람을 뽑고, 승무원을 훈련시키는 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보통 이 기간을 3년으로 잡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2년차인 올해부터 흑자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0년 뒤인 2020년엔 동양 최대의 항공사로 이스타항공을 키울 것입니다.”
가난이 싫다며 울던 소년이 사회생활 20년 만에 “2020년 20대 그룹에 진입하겠다”며 포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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