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추기경 `오, 펠릭스 꿀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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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09-02-16 09:48 조회5,842회 댓글0건본문
“오, 펠릭스 꿀빠!(Oh, Felix Culpa! 오, 복된 탓이여!).” 김수환 추기경은 지난 2007년 7월 ‘인생을 돌아보며’라는 글을 평화신문에 기고했었다.
그는 “내 나이 85살.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연히 과거를 되돌아보게 된다”며 “66년 전 1941년, 일본 상지대학에 갔을 때 학생 기숙사 사감이셨던 피스터 신부님은 나를 보고 기린아(麒麟兒)라고 하셨다. 행운아라는 말씀이었다. 처음에는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말씀 그대로 나는 정말 많은 시련과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에 비해 여러 가지 의미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회상했다.
오, 펠릭스 꿀빠!(Oh, Felix Culpa! 오, 복된 탓이여!). 김 추기경은 당시 “여생이 얼마일지 알 수 없으나 이제는 진실로 하느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주교표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대로 성체성사의 주님처럼 생명의 빵이 되는 삶, 모든 이의 ‘밥’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이 뜻하시는 대로,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이콘(ICON)이 돼야 할 것”이라며 “나는 나를 이렇게까지 큰 은총으로 축복하여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또 감사를 드리고 또 드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김 추기경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글들을 모아본다.
“형과 내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닐 때 한번은 어머니가 당신 친정이 있는 대구에 다녀오셨다. 짐작컨대 어머니는 거기 계시는 동안 성당에서 사제 서품의 장엄한 예식을 보고 오신 것 같다. 그때 어머니는 감명을 깊이 받으신 모양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리 둘에게 ‘너희는 이 다음에 신부가 되라‘고 이르셨다. 형은 그 이듬해 대구에 있는 신학교 예비과로 옮겼고, 2년 후 나도 가게 되었는데 형은 기쁘게 갔으나 나는 그렇지를 않았다. 어머니의 명을 따라 갔을 뿐이다” (「샘이 깊은 물」1984 ).
“과연 한평생을 착한 목자로 살 수 있을까?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내가 오히려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 18년 동안 하느님의 부르심에 회의를 여러 번 느꼈고, 신학교를 떠나고 싶은 마음에 꾀병을 내어 한 학기 건너뛰기도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조금도 변함없이 나를 한 길로 이끄셨다. 그 큰 섭리와 은혜에 엎드려 감사드렸다. 특히 어머니의 기도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해 69세이셨던 어머니는 ‘자식이 신부가 되는 게 소원’이었던 당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가슴 벅찬 순간을 맨 앞자리 마룻바닥에 꿇어앉은 채 지켜보고 계셨다. 그날 막내아들이 신부가 된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에서 기도와 눈물로 얼룩진 인고의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평화방송 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신앙인의 삶이란 게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을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내놓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어떤 사람을 하찮은 존재로 무시할 때 ‘저 사람은 우리 밥이야!’라는 표현을 쓴다. 주님은 그 정도로 당신을 낮추고 비우면서까지 우리 밥이 되어 주셨다. 나 역시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바쳐서 모든 이에게 밥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정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표어대로 살지 못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970-1980년대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더욱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 주려고 했을 따름이다. 그것이 가난하고 병들고 죄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시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십자가 제단에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믿었다”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일했다. 다른 사람들이 점수를 매긴다면 겨우 낙제점을 면할 정도겠지만 내 나름대로는 십자가를 지고 걷는 심정으로 살아왔다. 힘들고 지쳐서 그 십자가를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았다.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 사회 격동기의 한가운데 있을 때, 그로 인해 교회 안에서조차 압력과 비난이 쏟아질 때는 한 사제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 어떠했는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럴 때마다 나를 사랑해 주시는 분들의 기도와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내가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벗어 던지지 않고 끌고라도 갈 수 있었던 힘은 많은 이들의 기도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암울한 시대의 `빛과 소금`
그는 “내 나이 85살.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연히 과거를 되돌아보게 된다”며 “66년 전 1941년, 일본 상지대학에 갔을 때 학생 기숙사 사감이셨던 피스터 신부님은 나를 보고 기린아(麒麟兒)라고 하셨다. 행운아라는 말씀이었다. 처음에는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말씀 그대로 나는 정말 많은 시련과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에 비해 여러 가지 의미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회상했다.
오, 펠릭스 꿀빠!(Oh, Felix Culpa! 오, 복된 탓이여!). 김 추기경은 당시 “여생이 얼마일지 알 수 없으나 이제는 진실로 하느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주교표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대로 성체성사의 주님처럼 생명의 빵이 되는 삶, 모든 이의 ‘밥’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이 뜻하시는 대로,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이콘(ICON)이 돼야 할 것”이라며 “나는 나를 이렇게까지 큰 은총으로 축복하여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또 감사를 드리고 또 드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김 추기경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글들을 모아본다.
“형과 내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닐 때 한번은 어머니가 당신 친정이 있는 대구에 다녀오셨다. 짐작컨대 어머니는 거기 계시는 동안 성당에서 사제 서품의 장엄한 예식을 보고 오신 것 같다. 그때 어머니는 감명을 깊이 받으신 모양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리 둘에게 ‘너희는 이 다음에 신부가 되라‘고 이르셨다. 형은 그 이듬해 대구에 있는 신학교 예비과로 옮겼고, 2년 후 나도 가게 되었는데 형은 기쁘게 갔으나 나는 그렇지를 않았다. 어머니의 명을 따라 갔을 뿐이다” (「샘이 깊은 물」1984 ).
“과연 한평생을 착한 목자로 살 수 있을까?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내가 오히려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 18년 동안 하느님의 부르심에 회의를 여러 번 느꼈고, 신학교를 떠나고 싶은 마음에 꾀병을 내어 한 학기 건너뛰기도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조금도 변함없이 나를 한 길로 이끄셨다. 그 큰 섭리와 은혜에 엎드려 감사드렸다. 특히 어머니의 기도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해 69세이셨던 어머니는 ‘자식이 신부가 되는 게 소원’이었던 당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가슴 벅찬 순간을 맨 앞자리 마룻바닥에 꿇어앉은 채 지켜보고 계셨다. 그날 막내아들이 신부가 된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에서 기도와 눈물로 얼룩진 인고의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평화방송 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신앙인의 삶이란 게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을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내놓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어떤 사람을 하찮은 존재로 무시할 때 ‘저 사람은 우리 밥이야!’라는 표현을 쓴다. 주님은 그 정도로 당신을 낮추고 비우면서까지 우리 밥이 되어 주셨다. 나 역시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바쳐서 모든 이에게 밥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정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표어대로 살지 못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970-1980년대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더욱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 주려고 했을 따름이다. 그것이 가난하고 병들고 죄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시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십자가 제단에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믿었다”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일했다. 다른 사람들이 점수를 매긴다면 겨우 낙제점을 면할 정도겠지만 내 나름대로는 십자가를 지고 걷는 심정으로 살아왔다. 힘들고 지쳐서 그 십자가를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았다.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 사회 격동기의 한가운데 있을 때, 그로 인해 교회 안에서조차 압력과 비난이 쏟아질 때는 한 사제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 어떠했는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럴 때마다 나를 사랑해 주시는 분들의 기도와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내가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벗어 던지지 않고 끌고라도 갈 수 있었던 힘은 많은 이들의 기도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암울한 시대의 `빛과 소금`
“나를 밟고 학생들을 데려가시오”
"경찰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보게 될 것이고, 나를 쓰러뜨려야 신부님, 수녀님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을 쓰러뜨려야 학생들을 볼 것이다".
87년 6ㆍ10 항쟁 때 경찰을 명동성당에 투입하겠다고 통보하러 온 공안관계자에게 김 추기경이 한 말이다.
60년 대 말부터 80년대까지 한국은 경제개발의 후유증이 갈수록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독재자들의 장기 집권 야욕이 노골화하던 고단한 시기이기도 했다. 68년 서울대교구장, 69년 한국 처음이자 세계 최연소(당시)로 추기경에 임명된 그는 한국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온몸으로 부딪쳐야 했다. 그것은 서울대교구장 취임 인사말에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했던 자신의 다짐을 실천하는 것이기도 했다.
▶광야에 홀로 서서=68년 서울교구장 취임 인사차 만난 박정희 대통령의 첫 인상은 괜찮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3선 개헌안이 통과되고 71년 제 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도 모자란 듯 '비상대권'을 요구했다. 시대의 아픔에 대한 추기경의 고민은 깊어갔다. 그리고 그해 TV로 전국에 생방송된 성탄절 미사 강론에서 그는 성토에 나섰다.
"정부와 여당에 묻겠습니다.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그런 법을 또 만들면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당시 이 중계를 보던 박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면서 방송국에 방송 중지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뒤에 "그 때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 발언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라 회고했다. 국민을 위한 그리고 인간을 위한 그의 문제 제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인 장기 집권체제를 위한 사전 작업이 진행되던 72년 8월, 추기경은 주교회의 의장자격으로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발표한다. "우리는 7ㆍ 4 남북 공동성명이…평화 위장의 전쟁 준비 수단이나 권력 정치의 기만전술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민족과 더불어 엄숙히 경고한다…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실현을 촉구하고, 사회 안정과 질서를 흔드는 비상조치를 남발하는 권력의 폭주를 엄계한다…". 시대의 흐름을 내다본 내용이었다.
인권과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치적 민주화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그러면서 김 추기경은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그가 머물던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성지(聖地)가 되었다.
▶안팎에서 다가온 시련=한국 천주교회와 국가 권력의 대립은 79년 유신체제가 붕괴될 때까지 계속됐다. 72년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 사건이 시발이다. 지 주교가 이른바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구속된 사건이다. 지주교는 김지하 시인을 통해 농민과 탄광촌 주민을 도왔다. 그에게 용공분자라는 올가미를 씌우려는 것으로 판단한 가톨릭은 강력 반발했다. 주교회의가 소집되고 수백명의 신부들이 서울에 모여 철야 구국 기도회를 열었다. 유신 정권의 탄압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젊은 신부들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구성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들은 75년 9월 26일 시국선언에 이어 명동에서 사제들이 주도하는 최초의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를 전후해 숨가쁘게 이어진 국가권력과의 대립ㆍ갈등에서 추기경은 계속 중심에 서 있었다. 74년 시노트 신부 추방, 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ㆍ1절 구국기도회 사건, 78년 전주교구 사제 폭력사태 및 노동자들의 첫 명동성당 농성시위인 동일방직 노조탄압사건 그리고 79년의 오원춘 사건 등이다.
때로는 박 대통령을 설득하고, 때로는 젊은 사제들의 혈기도 달래야 했다. 교회도 분열됐다. 원로 신부들은 '구국사제단'을 만들어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교회의 현실 참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교황청에 투서를 보냈다. 추기경이 젊은 사제들을 부추긴다는 내용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교황청에 문책 요청을 하고 24시간 도청을 하는 등 추기경은 안팎의 바람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확고했다. 신부들을 포함한 각계 인사들이 유신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 구국 선언문'을 발표한 것이 76년 3ㆍ1 명동사건이다. 교회 내 일부에서 '신부의 사회활동이 지나치다'는 비판이 일었다. 이에 추기경은 시국 기도회 강론에서 당부했다. "그들이 나름대로 신앙적 소신과 양심에서, 나아가 보다 밝고 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애국심에서 한 행동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방법을 탓하더라도 순순한 동기는 탓하지 마십시오".
79년 10ㆍ26 사태로 유신 체제는 종말을 고하지만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 아니면 누가 희생하랴='서울의 봄'이 찾아 왔지만 추기경과 가톨릭의 시대적 소명은 끝나지 않았다.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감이 부푼 것도 잠깐, 신군부가 세력을 확장했다.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 80년 정월 초하룻날 새해 인사를 온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추기경이 한 쓴소리였다. 12ㆍ12 사태를 꼬집은 것이었다. 그러나 소용 없었다. 그해 5월, '광주 사태'가 벌어졌다. 훗날 추기경이 민주화 운동 20여 년 중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이라 꼽은 일이다. 광주 시민의 민주화 열망은 계엄군과 공수부대의 무력에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처참한 유혈사태에 추기경은 무력감을 절감해야 했다. 구속자들을 위한 구명운동을 벌이거나 "공권력이 인권 탄압에 쓰여지면 이것은 공권력이 아니요, 오히려 폭력"이라는 관련 담화문을 발표할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추기경은 예언자적 사명을 계속 수행했다. 82년 부산 미국문화원 사건의 주범들을 보호해준 최기식 신부를 "사제의 양심에 따른 당연한 행동"이라 옹호했다. 85년 학원 안정법에 반대한 데 이어 부천 성 고문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기도 했다. 87년 1월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군 추모미사에서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고 묻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추기경만이 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그래도 신앙의 꽃은 핀다=한편 이 기간에 한국 가톨릭교회는 급속한 성장했다. 추기경으로 상징되는 가톨릭이 민주화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것이 크게 작용했다. 경사도 이어졌다. 병인박해(18661868) 순교자 24위 시복식이 68년 10월 로마에서 거행됐다. 한국의 첫 추기경은 70년 아시아주교회의 연합회(FABC) 출범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81년엔 조선교구 설정 150년 대회를 서울 여의도에서 성대하게 치러냈다. 무엇보다 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해 한국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하고 한국 순교 복자 103위를 성인 반열에 올리는 성과를 끌어냈다.
하지만 추기경은 외형적 성장에 만족하지 않았다. 한국 가톨릭의 가장 시급한 과제가 사회의 인간화 문제임을 믿은 그는 89년 세계 성체대회를 준비하면서 '한 마음 한 몸 운동'을 추진했다. 헌혈과 입양을 장려하고 의지할 곳 없는 노인 등을 돌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서울대교구의 복지시설이 150여 곳으로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추기경 자신도 안구 기증을 서약했다
87년 6ㆍ10 항쟁 때 경찰을 명동성당에 투입하겠다고 통보하러 온 공안관계자에게 김 추기경이 한 말이다.
60년 대 말부터 80년대까지 한국은 경제개발의 후유증이 갈수록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독재자들의 장기 집권 야욕이 노골화하던 고단한 시기이기도 했다. 68년 서울대교구장, 69년 한국 처음이자 세계 최연소(당시)로 추기경에 임명된 그는 한국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온몸으로 부딪쳐야 했다. 그것은 서울대교구장 취임 인사말에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했던 자신의 다짐을 실천하는 것이기도 했다.
▶광야에 홀로 서서=68년 서울교구장 취임 인사차 만난 박정희 대통령의 첫 인상은 괜찮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3선 개헌안이 통과되고 71년 제 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도 모자란 듯 '비상대권'을 요구했다. 시대의 아픔에 대한 추기경의 고민은 깊어갔다. 그리고 그해 TV로 전국에 생방송된 성탄절 미사 강론에서 그는 성토에 나섰다.
"정부와 여당에 묻겠습니다.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그런 법을 또 만들면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당시 이 중계를 보던 박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면서 방송국에 방송 중지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뒤에 "그 때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 발언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라 회고했다. 국민을 위한 그리고 인간을 위한 그의 문제 제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인 장기 집권체제를 위한 사전 작업이 진행되던 72년 8월, 추기경은 주교회의 의장자격으로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발표한다. "우리는 7ㆍ 4 남북 공동성명이…평화 위장의 전쟁 준비 수단이나 권력 정치의 기만전술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민족과 더불어 엄숙히 경고한다…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실현을 촉구하고, 사회 안정과 질서를 흔드는 비상조치를 남발하는 권력의 폭주를 엄계한다…". 시대의 흐름을 내다본 내용이었다.
인권과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치적 민주화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그러면서 김 추기경은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그가 머물던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성지(聖地)가 되었다.
▶안팎에서 다가온 시련=한국 천주교회와 국가 권력의 대립은 79년 유신체제가 붕괴될 때까지 계속됐다. 72년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 사건이 시발이다. 지 주교가 이른바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구속된 사건이다. 지주교는 김지하 시인을 통해 농민과 탄광촌 주민을 도왔다. 그에게 용공분자라는 올가미를 씌우려는 것으로 판단한 가톨릭은 강력 반발했다. 주교회의가 소집되고 수백명의 신부들이 서울에 모여 철야 구국 기도회를 열었다. 유신 정권의 탄압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젊은 신부들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구성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들은 75년 9월 26일 시국선언에 이어 명동에서 사제들이 주도하는 최초의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를 전후해 숨가쁘게 이어진 국가권력과의 대립ㆍ갈등에서 추기경은 계속 중심에 서 있었다. 74년 시노트 신부 추방, 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ㆍ1절 구국기도회 사건, 78년 전주교구 사제 폭력사태 및 노동자들의 첫 명동성당 농성시위인 동일방직 노조탄압사건 그리고 79년의 오원춘 사건 등이다.
때로는 박 대통령을 설득하고, 때로는 젊은 사제들의 혈기도 달래야 했다. 교회도 분열됐다. 원로 신부들은 '구국사제단'을 만들어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교회의 현실 참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교황청에 투서를 보냈다. 추기경이 젊은 사제들을 부추긴다는 내용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교황청에 문책 요청을 하고 24시간 도청을 하는 등 추기경은 안팎의 바람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확고했다. 신부들을 포함한 각계 인사들이 유신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 구국 선언문'을 발표한 것이 76년 3ㆍ1 명동사건이다. 교회 내 일부에서 '신부의 사회활동이 지나치다'는 비판이 일었다. 이에 추기경은 시국 기도회 강론에서 당부했다. "그들이 나름대로 신앙적 소신과 양심에서, 나아가 보다 밝고 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애국심에서 한 행동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방법을 탓하더라도 순순한 동기는 탓하지 마십시오".
79년 10ㆍ26 사태로 유신 체제는 종말을 고하지만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 아니면 누가 희생하랴='서울의 봄'이 찾아 왔지만 추기경과 가톨릭의 시대적 소명은 끝나지 않았다.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감이 부푼 것도 잠깐, 신군부가 세력을 확장했다.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 80년 정월 초하룻날 새해 인사를 온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추기경이 한 쓴소리였다. 12ㆍ12 사태를 꼬집은 것이었다. 그러나 소용 없었다. 그해 5월, '광주 사태'가 벌어졌다. 훗날 추기경이 민주화 운동 20여 년 중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이라 꼽은 일이다. 광주 시민의 민주화 열망은 계엄군과 공수부대의 무력에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처참한 유혈사태에 추기경은 무력감을 절감해야 했다. 구속자들을 위한 구명운동을 벌이거나 "공권력이 인권 탄압에 쓰여지면 이것은 공권력이 아니요, 오히려 폭력"이라는 관련 담화문을 발표할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추기경은 예언자적 사명을 계속 수행했다. 82년 부산 미국문화원 사건의 주범들을 보호해준 최기식 신부를 "사제의 양심에 따른 당연한 행동"이라 옹호했다. 85년 학원 안정법에 반대한 데 이어 부천 성 고문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기도 했다. 87년 1월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군 추모미사에서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고 묻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추기경만이 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그래도 신앙의 꽃은 핀다=한편 이 기간에 한국 가톨릭교회는 급속한 성장했다. 추기경으로 상징되는 가톨릭이 민주화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것이 크게 작용했다. 경사도 이어졌다. 병인박해(18661868) 순교자 24위 시복식이 68년 10월 로마에서 거행됐다. 한국의 첫 추기경은 70년 아시아주교회의 연합회(FABC) 출범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81년엔 조선교구 설정 150년 대회를 서울 여의도에서 성대하게 치러냈다. 무엇보다 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해 한국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하고 한국 순교 복자 103위를 성인 반열에 올리는 성과를 끌어냈다.
하지만 추기경은 외형적 성장에 만족하지 않았다. 한국 가톨릭의 가장 시급한 과제가 사회의 인간화 문제임을 믿은 그는 89년 세계 성체대회를 준비하면서 '한 마음 한 몸 운동'을 추진했다. 헌혈과 입양을 장려하고 의지할 곳 없는 노인 등을 돌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서울대교구의 복지시설이 150여 곳으로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추기경 자신도 안구 기증을 서약했다
추기경은 낙타였다‥거인 김수환의 삶
16일 오후 6시12분께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87)은 1922년 6월3일 대구 가톨릭 집안의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신앙심이 돈독한 부친 김영석(요셉)과 모친 서중화(마르티나)가 아들을 추기경으로 키웠다. 세례명은 ‘스테파노’다. 초등학교 5년 과정인 군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의 권유로 형 동환과 함께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다. 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했다. 서울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 일본 도쿄의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수학했다.
44년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김 추기경은 일제의 강압으로 학병에 징집됐다. 항일 독립투쟁에 더 마음이 끌리던 시절이었다. 이듬해 전쟁이 끝나면서 상지대에 복학,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46년 귀국 후에도 서울 성신대(현 가톨릭대)로 편입해 신학 공부를 이어갔다. 이후 51년 9월15일 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천주교 신부가 됐다. 사목 생활을 시작한 곳은 경북 안동성당(현 목성동 주교좌성당)이다. 대구교구장 최덕홍(요한) 주교의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 원장, 경북 김천성당(현 김천 황금동성당) 주임 겸 성의 중·고등학교 장, 교구 평의원 등을 거치며 활동 범위를 넓혔다.
56년 독일 뮌스턴대학으로 유학, 동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64년 귀국해서는 가톨릭 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이 됐다. 66년 44세의 나이로 초대 마산교구장에 임명됐다. 사목 표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였다. 김 추기경은 67년 초 서울대교구장 노기남(바오로) 대주교가 사임하자 68년 제12대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됐다. 1년 뒤 교황 요한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당시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김 추기경의 서울대교구장 취임 일성은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였다. ‘봉사하는 교회’, ‘역사적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가 돼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핍박받고 가난한 이웃에게 애정을 쏟았다. 독재와 불평등이 극에 달할 때마다 직언을 했고, 역사의 흐름은 제 줄기를 찾았다. 서울대교구장으로 30년 동안 재임하면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을 2차례 역임했다. 주교회의 산하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고, 75년에는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70년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준비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서강대, 고려대, 연세대, 미국 노트르담대, 일본 상지대, 미국 시튼힐대, 타이완 후젠가톨릭대, 필리핀 아테네오대 등에서 명예 문학·법학·철학·인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훈장 무궁화장(1970), 제13회 성균관대 심산상(2000), 제2회 인제대 인제인성대상(2000), 독일 대십자공로훈장(2001), 칠레 베르나르도오히긴스 대십자훈장(2002) 등을 수훈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얼굴은 낙타상이다. 대신 지고 가야 할 짐이 몹시 많은 성직자의 관상이다. 성철(1911~1993) 큰스님은 코끼리상이다. 이유는 같다.
44년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김 추기경은 일제의 강압으로 학병에 징집됐다. 항일 독립투쟁에 더 마음이 끌리던 시절이었다. 이듬해 전쟁이 끝나면서 상지대에 복학,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46년 귀국 후에도 서울 성신대(현 가톨릭대)로 편입해 신학 공부를 이어갔다. 이후 51년 9월15일 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천주교 신부가 됐다. 사목 생활을 시작한 곳은 경북 안동성당(현 목성동 주교좌성당)이다. 대구교구장 최덕홍(요한) 주교의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 원장, 경북 김천성당(현 김천 황금동성당) 주임 겸 성의 중·고등학교 장, 교구 평의원 등을 거치며 활동 범위를 넓혔다.
56년 독일 뮌스턴대학으로 유학, 동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64년 귀국해서는 가톨릭 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이 됐다. 66년 44세의 나이로 초대 마산교구장에 임명됐다. 사목 표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였다. 김 추기경은 67년 초 서울대교구장 노기남(바오로) 대주교가 사임하자 68년 제12대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됐다. 1년 뒤 교황 요한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당시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김 추기경의 서울대교구장 취임 일성은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였다. ‘봉사하는 교회’, ‘역사적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가 돼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핍박받고 가난한 이웃에게 애정을 쏟았다. 독재와 불평등이 극에 달할 때마다 직언을 했고, 역사의 흐름은 제 줄기를 찾았다. 서울대교구장으로 30년 동안 재임하면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을 2차례 역임했다. 주교회의 산하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고, 75년에는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70년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준비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서강대, 고려대, 연세대, 미국 노트르담대, 일본 상지대, 미국 시튼힐대, 타이완 후젠가톨릭대, 필리핀 아테네오대 등에서 명예 문학·법학·철학·인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훈장 무궁화장(1970), 제13회 성균관대 심산상(2000), 제2회 인제대 인제인성대상(2000), 독일 대십자공로훈장(2001), 칠레 베르나르도오히긴스 대십자훈장(2002) 등을 수훈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얼굴은 낙타상이다. 대신 지고 가야 할 짐이 몹시 많은 성직자의 관상이다. 성철(1911~1993) 큰스님은 코끼리상이다. 이유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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