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왕 선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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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09-08-27 07:25 조회2,283회 댓글0건본문
남자 후보 제치고 일찌감치 낙점, 여성의 당당한 승리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선덕여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며 동양사적으로도 의미가 큰 선덕여왕이 새삼 관심을 끄는 것은 오늘날 여성의 높아진 위상과도 관련이 있다. 수세기 전, 남성 중심의 신분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최초의 여왕이 탄생한 배경과 그녀에 대한 평가를 되짚어봤다.
드라마 ‘선덕여왕’이 인기다. 드라마에는 선덕이 언니 천명공주와 쌍둥이였고 태어나자마자 궁녀가 데리고 도망쳐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나오는데, 이는 기록에 없는 허구라고 한다. 드라마의 허구와 사실은 늘 논란거리다. 극적인 구성을 위한 궁여지책일 수 있지만 역사를 잘 모르는 일반 시청자는 드라마를 사실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고대사는 문헌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아 더 그렇다. 선덕여왕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신라 연구자들이 펴낸 책들을 중심으로 선덕여왕의 실체를 재구성해보았다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년)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인 측천무후도 선덕여왕보다 반세기 후에야 비로소 등장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선덕여왕 즉위는 동양사적으로도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신라는 지금보다 남녀평등이 더 잘 이뤄진 사회였을까? 이에 대해 한국 고문학계 원로이며 평생 신라사를 연구해온 이종욱 교수(서강대 총장)는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탄생하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시스템적 이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바로 신라만이 갖고 있던 성골· 진골이라는 독특한 신분제도다.
현대사회인 지금도 흔히 조직 내 ‘주류’를 일컬을 때 곧잘 비유적으로 쓰이는 ‘성골’이란 말은 신라만이 가졌던 일종의 계급이다. 520년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하면서 성골을 만들었다. 이전부터 존재했던 귀족계급 진골보다 상위 신분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성골은 왕과 그의 형제, 그들의 자녀로 이뤄진 혈족집단’을 가리킨다. 인류학에서 흔히 말하는 종족집단이며 핵가족보다 한 단계 확대된 집단이라고 보면 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왕의 혈육이라고 해서 무조건 성골이 되는 것은 아니다. 후궁이 아닌 왕비(황후, 왕후 등으로 불렸다)가 낳은 자식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새 왕이 즉위하면 새로운 성골 집단이 만들어지는데 이 경우 이전 왕의 형제와 자녀들은 진골로 신분이 떨어졌다(족강·族降)고 한다. 새롭게 편입된 성골 중에서 재위 중인 왕의 다음 대(代), 곧 그의 아들이나 형제의 아들은 모두 왕위 계승자로 선택될 수 있었다.
법흥왕에 이어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이 재위했을 때도 각각의 왕을 중심으로 한 성골 집단이 있었다. 진흥왕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장남 동륜태자가 개에 물려 죽는 바람에 차남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진지왕이다. 진지왕 다음 대는 다시 장남 직계로 동륜태자의 장남이 왕위에 오른다.
성골 남자가 없다
문제는 진평왕 대에 이르러 발생했다.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물론 선덕여왕의 작은아버지인 진지왕에게 아들(김춘추 29대 태종무열왕의 아버지 용수)이 있었지만, 그보다 형인 진평왕이 즉위하면서 진평왕의 직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성골 집단이 만들어졌고, 따라서 진지왕 직계들은 진골로 신분이 강등됐다(조범환 ‘우리 역사의 여왕들’). 왕족이지만 아예 왕궁을 떠나 성골 거주 구역이 아닌 곳에 살아 공간적으로도 왕실과 멀어졌다. 더구나 진지왕은 즉위 4년도 안 돼 폐위되고 만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진지왕은 색을 밝혀 방탕했다. 폐위된 왕이 왕궁에서 살 수 없었으니 아들 용수도 자연히 왕궁과 멀어진 것이다. 급기야 진지왕은 폐위 3년 뒤 죽음에 이른다.
진평왕에게 직계 아들이 없었지만, 선덕여왕에겐 남편(음갈문왕)이 있었다. 실제로 선덕여왕 전후에 사위가 왕위를 잇는 경우가 있었다. 4대왕 석탈해는 처남 유리왕의 유언에 따라 즉위했고, 13대 미추왕은 11대 조분왕의 사위로 처삼촌인 12대 점해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선덕여왕 이후 한참 뒤인 48대 경문왕은 47대 헌안왕 사위였고, 53대 신덕왕은 49대 헌강왕 사위였다고도 한다.
조범환 박사는 선덕여왕이 왕위에 올랐을 즈음이면 남편 음갈문왕이 이미 죽어버린 뒤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여왕의 경우 생몰연대가 없지만 생몰연대가 밝혀진 조카 김춘추를 중심으로 나이를 역산해보건대, 선덕여왕은 50세가 넘은 나이에 즉위했고 이 나이라면 남편이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김춘추가 59세로 사망했다는 점을 들면 당시 남성의 평균 연령이 대략 추정된다). 따라서 진평왕이 사망했을 당시 성골 남자가 없었던 게 분명하다는 것이 학자들의 중론이다. 남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도 남자가 없었던 탓에 선덕여왕이 성골 신분으로 남녀불문 왕위를 잇게 된 것이다.
선덕여왕이 왕위를 이어받은 데는 신라 특유의 여성 배려(?) 제도 덕분도 있다. 다름 아닌 여자도 한 대에 한해서이긴 하나 가계 혈통을 이을 수 있는 ‘부계성원권’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선덕은 여자였지만 부계성원권에 의해 성골 신분이었던 것이다.
한편 진평왕에게는 선덕뿐만 아니라 천명이라는 딸도 있었다. 이종욱 교수는 ‘‘삼국사기’선덕여왕 즉위 조에는 선덕이 진평왕의 장녀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천명을 먼저 결혼시킨 것으로 보아 천명이 장녀였음을 알 수 있다’(‘춘추’)고 전한다. 진평왕은 당초 맏딸 천명의 남편인 용수를 왕위 계승자로 점찍었으나 선덕의 자질이 점차 빛을 발하자 그런 생각을 버리고 천명공주와 더불어 출궁토록 했다고 한다. 천명은 출궁 즉시 성골에서 진골로 족강되어 왕위 계승 자격을 잃었다. 하지만 훗날 그의 아들 춘추가 왕이 되니 억울해 할 일은 아니라고 보아야 하나.
이종욱 교수는 “이처럼 선덕여왕의 즉위는 계급제도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어서 따로 신비화할 필요는 없다”며 “선덕이 여자라는 것을 강조하기보다 그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 교수의 얘기는 당시 고구려 백제는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여자 왕이 배출된 일이 없기에 선덕여왕 즉위는 ‘비정상적’이었던 게 사실이지만, 당시 제도에 의한 산물이었기에 선덕을 ‘여자 왕’으로 보지 말고 ‘왕으로 보아야 한다’는 강조다.
한편 조범환 박사는 선덕여왕 즉위 당시의 국제 정세도 최초의 여왕을 배출하는 데 한몫했다고 분석한다. 바로 일본의 정치상황이다.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39년 전인 593년에 이미 일본에서는 최초의 여성 천황인 스이코(推古) 천황이 등극했다. 당시 신라는 진평왕 15년이었으며 일본과 교류가 활발했다. 진평왕은 사신들에 의해 일본에 여자 천황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이런 배경이 유례없는 여성의 왕위계승을 염두에 두도록 했을 거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고구려 백제에 비해 신라는 수도를 옮기는 천도가 한 번도 없었을 정도로 안정된 사회였다는 점 또한 여왕이 나온 배경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대내외 조건이 갖춰졌다 하더라도 선덕여왕의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고 총명하고 똑똑했다는 점, 무엇보다 국인(國人)들이 추대했다는 점을 반드시 짚어야 한다고 조 박사는 강조한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선덕왕이 즉위했다. 휘는 덕만이다. 진평왕 장녀로서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똑똑했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국인(國人)이 덕만을 세웠다.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 (‘삼국사기’ 권5, 선덕왕 즉위년)
이 말을 풀어보면 아들이 없던 진평왕 사후에 국인들이 덕만을 추대해 왕위에 올랐다는 뜻이다. 조 박사는 여기서 특기할 만한 단어로 ‘국인’을 꼽는다. 국인이란 신라시대에 나름대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었다. 조 박사는 여러 기록을 통해 국인의 의미를 이렇게 적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진지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국인들이 그를 폐했다는 기록이 있다. (국인은) 왕위계승과 폐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나 세력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로 미뤄보면 선덕여왕의 왕위계승에 관여한 국인들은 그녀를 지지하는 정치세력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우리 역사의 여왕들’)
비록 성골 남자가 없어 선덕이 여왕이 되었으나, 왕이 여론을 무시하거나 집권세력의 분위기를 무시한 독자적 선택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생전에 진평왕은 딸이 왕위를 계승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정치조직 개혁과 정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폐위된 작은아버지 진지왕의 아들 용수(자신의 딸 천명의 남편이기도 함)를 불러들여 왕실 업무를 총괄하는 최고 관부인 내성사신에 임명했다. 혹시라도 범(凡) 왕족으로 기득권을 갖고 여왕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이 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왕을 호위하는 경비부대인 사위부도 개편해 왕위계승에 반대할 세력을 제거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반란세력에 대한 처벌도 가혹했다. 진평왕은 죽기 1년 전인 631년에 반란을 일으킨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의 난을 진압하면서 칠숙의 경우 무려 구족(九族)을 멸하는 연좌제를 단행해 반란의 싹을 잘라내려고 애썼다.
선덕여왕은 비교적 오래전에 왕위계승을 통고받았다. 진평왕이 선덕공주를 왕위계승자로 삼은 시기는 30대 초반인 612년 전후로 추정된다고 한다. 632년 50대 초반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대략 20년 동안 왕위 계승자의 지위를 갖고 산 셈이다. 21년 동안 진평왕은 딸에게 제왕의 자질을 키우도록 했을 테니 선덕왕은 ‘준비된 왕’이었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연호를 고치는 자신감
‘삼국사기’를 쓴 고려시대 유학자 김부식은 ‘신라에서 여자를 일으켜 세워 왕위에 올렸으니 실로 난세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대놓고 욕을 했지만 신라 사람인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선덕공주는 자라며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을 갖추어 왕위를 이을 만했다’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삼국사기’는 아예 선덕여왕을 여왕이라 칭하지 않고 ‘선덕왕’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참조하면서도 민간에 유통하고 있던 사료나 설화들을 적극 모아 자료로 삼은 일연의 ‘삼국유사’는 선덕여왕으로 표기하고 있다(김기흥 ‘천년의 왕국 신라’). 이는 민간에서도 여왕의 즉위가 큰 관심사였음을 짐작케 한다.
즉위 원년 선덕여왕은 대신인 을제(乙祭)에게 국정 전반을 맡겼다. ‘아무래도 집권 초반기 순탄하지 않았을 즉위 과정에서 왕위 문제를 논의할 때 지도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이는 을제에게 국정을 맡겨 진골 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우려 한 조치’(김기흥 ‘천년의 왕국 신라’)로 추정된다.
전반기 정국 운영은 ‘삼국사기’를 토대로 할 경우 몇 가지로 정리된다. 우선 즉위한 해에 각 도에 사신을 파견해 홀아비와 홀어미, 부모 없는 어린아이와 늙어 자식이 없는 사람, 그리고 혼자 힘으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사람을 구제했다.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위로하고 구제하는 민심수습의 일환으로 재위 2년 되던 633년에는 전해의 가뭄을 이유로 그해 세금을 면제해주기도 했다.
재위 3년 정월에는 깜짝 놀랄 만한 조치를 단행하는데, 다름 아닌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친 것이다. 아버지 진평왕의 국상기간이 끝나자 아버지 때부터 쓰던 ‘건복’이라는 연호 대신 독자적인 연호를 쓴 것이다. 이는 자신감의 표현이며 자신의 통치를 대내외적으로 알리려는 의도로 보인다.
선덕여왕은 전쟁도 많이 치렀다. 당시 정세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라는 진흥왕 때 영토를 크게 넓혔다. 북한산비 창녕비 마운령비 황초령비 등 우리가 국사 시간에 달달 외운 ‘진흥왕 순수비’가 이를 잘 말해준다. 신라의 영토 확장에 자극받은 백제와 고구려는 계속해서 신라를 공격했다. 신라는 두 나라를 상대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선덕여왕 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여왕은 재위 5년째인 636년 서남쪽 변경에 쳐들어온 백제 군사들을 물리쳤다. 재위 7년에는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크게 이겼다.
한편 재위 8년 2월에 서울 외에 작은 도시를 두는 인구 분산책을 꾀했고 재위 9년에는 도당유학생을 파견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선덕여왕의 최고 업적으로 첨성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첨성대가 여왕의 작품이라는 점은 여러 기록에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첨성대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별을 관측하는 건물(瞻星臺)이라는 명칭 때문에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도 첨성대가 ‘천문관측대’라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 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선덕여왕 2년(63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타나며 조선 말기 ‘증보문헌비고’는 선덕여왕 16년(647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구체적인 제작시기까지 기록하고 있다. 다만 이 책들이 어떤 자료를 근거로 했는지가 안 나타나 있다.’(‘우리 역사의 여왕들’)
첨성대 같은 관측 건물을 세워 자연재해를 미리 예방하려 했던 것은 여왕이 그만큼 뛰어난 왕이었음을 보여준다.
불교의 힘
여왕은 연호를 바꾼 해에 분황사(芬皇寺)를 낙성한다. 분황사는 경주시내 황룡사 터 바로 옆에 있는데, 후대에 다시 지어져 지금도 사찰로 이용된다. 선덕여왕은 이미 3만여 평(9만9000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사찰인 황룡사가 지척에 있는데도 분황사를 또 지었다. 공사기간만 3년이 걸린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석공만 200여 명, 인부 100여 명을 합쳐 모두 300여 명의 인력이 동원됐다. ‘이는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왕위를 계승하고 역시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정치적 틀 속에서 안주하던 방식을 어느 정도 떨쳐내고 자기 나름의 정치를 펼쳐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김기흥)이라는 분석이다.
이 분황사는 ‘향기로운 황제의 사찰’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여성적이다. 더구나 1915년에 일본인들이 탑을 수리하다가 2층과 3층 사이에서 돌로 만든 사리함을 발견했는데 뜻밖에 실패와 바늘통 같은 각종 바느질 용구가 출토됐다. 함께 출토된 금바늘 은바늘은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것이라기보다 귀족들, 나아가 왕실이 갖고 있던 물건임을 짐작케 해 선덕여왕과의 관련성을 짚는 학자들이 있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이름부터 불교적이다. 아버지 진평왕은 석가모니 이름을 가졌고 어머니 이름‘마야’도 석가모니 어머니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선덕이란 이름도 ‘불교경전인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想經)’에 나오는 선덕바라문을 모범으로 해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김기흥)
여왕은 재위 15년 동안 무려 25개 사찰을 창건했다. 이는 통치와 관련한 나름대로의 수단이라는 분석이 많다.
‘해동의 명현 안홍이 지은 ‘동도성립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신라 27대에 여자가 왕이 되니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으므로 구한이 침범하게 되었다. 만약 대궐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의 침해를 진압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탑을 세웠다.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화를, 제3층은 오월을, 제4층은 탐라를, 제5층은 응유를, 제6층은 말갈을, 제7층은 단국을, 제8층은 여적을, 제9층은 예맥을 진압시킨다.’(‘삼국유사’ 권3 탑상 4 황룡사구층탑, ‘우리 역사의 여왕들’에서 재인용)
실제로 선덕여왕 즉위 후 통치가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후기로 갈수록 심해졌다. 642년 가을, 백제 의자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 서쪽 40여 성을 빼앗아갔고 그해 8월에는 백제 고구려 연합군이 당항성을 빼앗아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끊으려고 했다. 또 같은 달 백제장군 윤충이 대야성을 공격해 함락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조카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죽기도 했다. 놀란 여왕은 자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위급함을 알리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선덕여왕은 불교세력을 정치에 이용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뜬’ 인물이 자장이다. 진골 귀족 출신 자장은 높은 관직을 사양한 채 당나라에 건너가 불법을 닦았다. 그는 유학 중 직접 문수보살을 보았다면서 신라 왕실은 석가모니 집안과 같이 부처님으로부터 미리 특별한 약속을 받은 종족으로 다른 귀족들과는 출신 성분이 다르다는 사실을 직접 들었다고 전하면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노력했다.
자장은 여왕의 배려로 당에서 공부했고 다시 여왕의 뜻에 따라 귀국했다. 그는 당 유학 중에도 단지 불법을 닦는 데 그치지 않고 늘 신라의 안전을 걱정하며 여왕 통치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두 사람은 거의 동년배로 알려졌다. 자장은 귀국 후 여왕에게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이 여왕을 깔보지 못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여왕은 그를 황룡사 사주 겸 국통에 임명해 불교교단을 정비하고 전국의 승려를 조직화했다.
자장은 국민을 상대로 보살계를 주었는데, 이 보살계는 살생을 무조건 죄악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재미로 살생을 하면 문제가 되지만 나라나 부모를 위한 살생은 괜찮다는 것이다.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전쟁에 동원되어야 했던 국민에게 살생은 죄가 안 된다고 함으로써 불교가 전쟁 수행을 중시하는 세속의 가치와 대립되지 않음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 선덕여왕은 왕 자신이 불교세력에 의지함으로써 기존 정치세력과 무관한 새로운 세력을 통해 왕권을 더욱 강화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비담의 난
선덕여왕은 ‘첫 번째 여왕’으로서 선구자적 어려움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 자장조차 중국에 유학하면서 태화못이란 곳에서 만난 신령으로부터 ‘여자가 통치를 하면 나라가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는 기록(‘삼국유사’)이 있다. 사람도 아닌 유령이 이런 말을 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귀신조차 여왕의 존재를 달갑지 않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남성들 사이에도 여성비하 의식이 존재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선덕여왕은 결국 말년(647년)에 대규모 반란사태에 직면한다. 비담과 염종의 난이 바로 그것이다. ‘봄 정월에 비담과 염종 등이 말하기를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며 반역을 꾀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했다.’(‘삼국사기’ 권5. 선덕왕 16년)
이 난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여왕의 통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수많은 귀족이 가담해 여왕에게 엄청난 심적 고통을 안겼다. 난에 가담한 조정 신료가 30명에 달해 주요 직책을 맡은 신료 중 적지 않은 수가 반란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담은 선덕여왕을 여왕이 아니라 여주(女主)라고 비하해 부를 정도였다.
비담은 귀족 중에서도 최고 귀족이었다.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없을 때 가장 먼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상대등’이었다. 그는 당시 당나라 태종이 신라에서 온 사신에게 ‘그대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도둑을 불러들이니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고 말한 것을 전하며 반란세력을 규합했다고 한다. 후계자(진덕여왕)까지 여왕으로 정해지자 난을 일으켰다.
반란은 김유신에 의해 진압된다. 김유신은 당시 특별한 존재였다. 부친 서현이 이미 왕실의 일원인 숙흘종의 딸 만명과 결혼해 왕실이 외가였으며 여왕의 조카이기도 한 김춘추와 그의 여동생(문희)이 결혼해 왕실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김유신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진으로 돌진하고, 한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와서는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바로 다른 전쟁터로 달려가는 등 충성심과 용맹심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을 철저하게 지지하고 보호하려 애썼다. 비담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며 한 말에는 그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자연의 이치에서는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러우며 사람의 도리에서는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습니다. 만약 혹시 그 질서가 바뀌면 곧 혼란이 옵니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군주를 해치려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침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로서 사람과 신이 함께 미워하고 천지가 용납할 수 없는 바입니다. …생각건대 하늘의 위엄은 사람의 하고자 함에 따라 착한 이를 착하게 여기고 악한 이를 미워하시어 신령으로서 부끄러움을 짓지 말도록 하십시오.’(‘우리 역사의 여왕들’에서 재인용)
김유신은 여왕이 통치를 잘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비담에 대해 군신관계를 중요시하는 유교의 명분을 들었다. 일부 귀족들이 여자를 비하하는 것에 대한 반대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여성의 승리
역사상 첫 여왕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시대상황마다, 왕마다 서로 달랐다. 당과 연합해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한 후 다시 당의 공격을 받은 문무왕 때는 당에 대해 당당했던 여왕을 향한 추모 분위기가 일었다. 당시 문무왕은 선덕여왕이 세운 영묘사를 성전사원으로 관리하고 자신도 이 영묘사 앞에서 열병행사를 할 정도였다. 선덕여왕이 세운 황룡사 구층탑을 중수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에서도 여왕이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 속에서 국가를 수호하는 위업을 닦았다고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신라 하대에 이르러 헌안왕은 선덕과 진덕 두 여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과인은 불행히도 아들이 없고 딸만 있다. 우리나라의 옛 일에 비록 선덕과 진덕 두 여자 임금이 있었으나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비슷하므로 본받을 일이 못 된다. 사위(경문왕)는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노련하고 성숙한 덕을 가지고 있다. 경들은 그를 왕으로 세워 섬기면 반드시 선조로부터 이어온 훌륭한 왕업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다.’(‘삼국사기’ 권11 헌안왕 5년 봄 정월) 그가 이 말을 한 30년 뒤에 경문왕의 딸인 신라 세 번째 여왕, 진성여왕이 즉위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선덕여왕은 재위 5년째인 636년부터 병이 나 몸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종욱 교수는 여왕의 말년을 이렇게 기술했다. ‘선덕여왕은 636년 3월 병이 들었는데 의술과 기도로는 고칠 수 없어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열기도 했다. 어떤 병이 걸렸는지는 알 수 없으니 그 후 10년간 병에 시달린 것으로 볼 수도 있다. …647년 1월8일 선덕여왕은 세상을 떠났다. 그 열흘 후 비담의 난이 진압되고 그(비담)의 목이 떨어졌다.’(‘춘추’)
이 교수는 ‘신라의 역사’라는 책에서 신라시대 여성의 지위가 딱히 높지는 않았다고 밝힌다. 부계제 사회였기 때문에 혼인을 하면 여자는 남자 집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원칙이었다. 다만 여자 집안의 신분이 높으면 남자가 여자 거처로 옮겨 여러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신라는 신분의 지배가 ‘부계’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왕이 나왔다고는 해도 다른 관직에 여성이 임명된 예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여자들도 권력게임에 합류했다. 7세에 왕이 된 진흥왕의 뒤에서 섭정한 지소태후나 진평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사도왕후와 미실 등이 진지왕을 즉위시킨 과정에서 왕실 여성들의 역할이 막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독특하게 여성들 중 왕비를 공급하는 가계(인통)가 있었다고 한다. 지배세력의 부인들을 배출하며 세력을 유지하는 독특한 가계(진골정통 대원신통)였는데 ‘이는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신라의 독특한 제도’(이종욱 ‘춘추’)라고 한다.
이처럼 신라를 움직이는 사회 시스템은 현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철저한 신분제(골품·骨品)였다. 그런데도 오늘날 다시 선덕여왕이 소설 드라마 같은 문화 아이콘으로 등장한 이유로는 뭐니뭐니해도 여성의 지위 향상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달라졌음을 꼽을 수 있다.
‘그들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남성들보다 뛰어난 힘을 가졌다거나 정치적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도리어 남성들과 비교해볼 때 여러 측면에서 열악한 상황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등극이 이뤄진 것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승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조범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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