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각막 이식 수술한 서울성모병원 안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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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09-12-21 11:02 조회2,140회 댓글0건본문
지난 2월16일 오후 2시, 서울 반포동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수술방에서 백내장 수술을 하고 있던 주천기(53·서울성모병원 안센터장) 교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병원 영성부원장 최정진(현 원목실장) 신부였다.
“오늘이 될 것 같습니다. 준비하셔야 겠습니다.”
“네, 수술 마치고 대기하겠습니다.”
주 교수는 전화를 끊고 수술을 이어나갔다. 그는 “당시 마음을 다스리려 했지만 자꾸만 겁이 났다”고 했다. 주 교수는 백내장 수술, 각막이식수술, 레이저 수술 등 각종 눈 수술을 한달에 150~200여 차례 집도하는 21년차 베테랑 의사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낮게 깔린 저녁, 병원 앞 8차선 도로에 반포대교를 오가는 자동차들이 꾸역꾸역 밀려 들었다. 주 교수는 끼니 생각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천주교 김수환(金壽煥·87) 추기경은 이날 오후 6시12분 이 병원 9010호 입원실에서 선종(善終)했다. 김 추기경은 지난해 7월부터 노환으로 이곳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왔다.
◆나무 묵주와 두 눈만을 남기고 떠난 사람
오후 6시30분, 주 교수는 전문의 3명과 함께 추기경이 잠든 병실로 향했다. 안구를 기증받기 위해서였다. 문 앞에 모여 있던 수십여명의 취재진이 그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댔다. 병실 안에서 김 추기경은 환자복을 입은 채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가슴에 꽂은 링거 주사로 영양을 공급받아온 까닭에 야윈 얼굴이었다.
“하늘나라에 가시면서 숭고한 일을 하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새 빛을 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시간 뒤, 의료진은 가로 25㎝·세로 15㎝짜리 스티로폼 박스를 소중하게 들고 황급히 병실을 빠져나갔다.
김 추기경은 지난 1990년 1월 5일 헌안(獻眼) 서약서에 서명했다. 주 교수는 “시대의 등불 같았던 분과 작별하는 역사적인 순간에 의사란 이유로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며 “마음 한편으론 내가 맡은 일이 이렇게 부담스러울 줄 몰랐다”고 했다.
“당시 추기경이 선종하시기 1달 전쯤, 병원에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높으신 분인데 안구를 감히 적출할 수 있느냐’는 의견이었죠. 결국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답해줬습니다. ‘추기경의 뜻이 그러하다면 기증하는 게 맞다’고요.”
김 추기경의 각막은 고령에 백내장 수술을 한 경력이 있었음에도 세포 숫자가 이식 가능 수치를 충분히 넘겼다. 각막은 바로 다음날 2명의 대상자에게 이식됐다. 주 교수와 김만수(55) 교수가 각각 집도했다.
언론이 이를 보도하자, 그 후 “김 추기경의 길을 따르겠다”는 장기기증희망자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는 올해 1월부터 지난달까지 장기기증희망자가 17만6959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지난해 같은 기간동안 7만59명이 기증의사를 밝힌 것에 비하면 2.5배 늘어난 수치다.
주 교수는 “나무 묵주 하나와 두 눈만을 남기고 떠나신 김 추기경님 덕분에 내 인생도 변하고 있다”고 했다. “추기경님이 백내장 수술로 병원에 입원하셨던 적이 있지요. 그 때 저는 멀리서 추기경님을 처음 뵈었어요. 환자복 위에 하늘색 윗 옷을 걸치고 수녀님 한 분과 단촐하게 걸어가시던 모습이었습니다.”
◆‘100’
주 교수는 제자들 사이에서 ‘완벽주의자 기질이 강한 무서운 스승’으로 통했다. 그는 “의사는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것보다 최고의 실력으로 환자에게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제자가 실수를 하면 그 자리에서 호통을 치고, 따끔하게 혼냈습니다. 일 중독자처럼 연구에 매달렸어요. 아침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도 일을 멈추는 게 싫어 저녁이 되어서야 엉금엉금 걸어 간 적도 많았지요.”
지금까지 국제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에는 그가 쓴 논문 105편이 실렸다. 그는 “의사 생활을 하면서 늘 ‘SCI에 영어 논문 딱 100편만 등재하면 은퇴하겠다’며 ‘그 목표를 이루는 날, 제자들을 싹 모아서 잔치를 벌일 것’이라고 말해왔다”고 했다.
지난해 말, 주 교수는 100편째 논문을 실었다. 그는 “20년 넘게 ‘최고의 실력’만을 좇아 달렸는데, 꿈에 그리던 ‘100’이란 숫자가 점점 가까워 질수록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영어로 논문을 쓴다는게 너무 어려웠어요. 힘들어도 꾹꾹 참았습니다. 환자들에게 ‘더 잘할 수 있었는데…’하는 생각이 들면 밤에 잠도 못자고 끙끙 앓기도 했지요. 집에선 늘 수술 비디오를 틀어놓고 그것만 들여다 봤더니 어느새 훌쩍 큰 두 아들과도 데면데면 해졌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고요.(웃음)”
◆김 추기경이 남기고 간 것들
3개월쯤이 지났을 무렵, 주 교수는 서울성모병원의 안센터장으로 김 추기경의 안구 적출과 각막 이식 수술에 나서게 됐다. “원래 ‘안구적출’은 전공의들의 몫이에요. 그동안 저는 적출해온 안구에서 각막을 이식하기만 하면 되었구요. 안구적출은 일반적으로 시신이 옮겨진 영안실에서 이뤄집니다. 30분 정도 걸리는 시술이지요. 복잡한 고난이도의 수술을 해왔던 저였지만, 당시 추기경께서 영면하신 병실로 들어가 안구를 적출하자니 너무나도 두려웠습니다.”
그는 “문득 ‘피가 많이 나오면 어떡하나’‘주변 조직이 상하면 어쩌지’‘이렇게 추기경의 몸에 손을 댔으면서 이식 수술 결과가 좋지 않으면 어떡하나’하는 걱정들이 꼬리를 물었다”고 했다.
그가 마주한 김 추기경은 사제복을 갖춰 입은 위엄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이 병원 9010호에서 추기경은 환자복을 입고, 마른 얼굴로 한 손에 나무 묵주를 쥔 채 세상과 소박한 작별을 했다. 주 교수는 “이후 순조롭게 수술을 진행했다”고 했다.
주 교수는 “요즘도 추기경의 각막을 이식 받은 대상자분들이 찾아와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그동안 논문에 치여 봉사라는 것은 아예 잊고 살았는데, 한해를 추기경과의 따뜻한 작별로 시작했더니 사회봉사활동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는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5일까지 저개발국 아동구호단체 월드쉐어와 함께 아프리카 케냐 케리쵸시에 있는 케리쵸지역병원에서 18명의 아이들에게 백내장 수술을 해주고 돌아왔다. 주 교수는 “병원에서 수술 기구를 알콜램프로 켠 불로 소독 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무뎌진 수술용 칼을 쓱쓱 불에 그을려 사용하는 이들을 보며 ‘나와 내 주변의 환경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만큼 풍족한 가’를 깨달았다”고 했다.
“그 곳에서 아이들이 흙바닥에 모포 한장을 깔고 살고 있었어요. 저는 의사는 최고의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누어 줄 수 있을 때 나눠야죠. 또 갈 수 있으면 또 갈 거에요. 2009년은 제 인생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 해였습니다.”
“오늘이 될 것 같습니다. 준비하셔야 겠습니다.”
“네, 수술 마치고 대기하겠습니다.”
주 교수는 전화를 끊고 수술을 이어나갔다. 그는 “당시 마음을 다스리려 했지만 자꾸만 겁이 났다”고 했다. 주 교수는 백내장 수술, 각막이식수술, 레이저 수술 등 각종 눈 수술을 한달에 150~200여 차례 집도하는 21년차 베테랑 의사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낮게 깔린 저녁, 병원 앞 8차선 도로에 반포대교를 오가는 자동차들이 꾸역꾸역 밀려 들었다. 주 교수는 끼니 생각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천주교 김수환(金壽煥·87) 추기경은 이날 오후 6시12분 이 병원 9010호 입원실에서 선종(善終)했다. 김 추기경은 지난해 7월부터 노환으로 이곳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왔다.
◆나무 묵주와 두 눈만을 남기고 떠난 사람
오후 6시30분, 주 교수는 전문의 3명과 함께 추기경이 잠든 병실로 향했다. 안구를 기증받기 위해서였다. 문 앞에 모여 있던 수십여명의 취재진이 그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댔다. 병실 안에서 김 추기경은 환자복을 입은 채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가슴에 꽂은 링거 주사로 영양을 공급받아온 까닭에 야윈 얼굴이었다.
“하늘나라에 가시면서 숭고한 일을 하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새 빛을 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시간 뒤, 의료진은 가로 25㎝·세로 15㎝짜리 스티로폼 박스를 소중하게 들고 황급히 병실을 빠져나갔다.
김 추기경은 지난 1990년 1월 5일 헌안(獻眼) 서약서에 서명했다. 주 교수는 “시대의 등불 같았던 분과 작별하는 역사적인 순간에 의사란 이유로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며 “마음 한편으론 내가 맡은 일이 이렇게 부담스러울 줄 몰랐다”고 했다.
“당시 추기경이 선종하시기 1달 전쯤, 병원에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높으신 분인데 안구를 감히 적출할 수 있느냐’는 의견이었죠. 결국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답해줬습니다. ‘추기경의 뜻이 그러하다면 기증하는 게 맞다’고요.”
김 추기경의 각막은 고령에 백내장 수술을 한 경력이 있었음에도 세포 숫자가 이식 가능 수치를 충분히 넘겼다. 각막은 바로 다음날 2명의 대상자에게 이식됐다. 주 교수와 김만수(55) 교수가 각각 집도했다.
언론이 이를 보도하자, 그 후 “김 추기경의 길을 따르겠다”는 장기기증희망자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는 올해 1월부터 지난달까지 장기기증희망자가 17만6959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지난해 같은 기간동안 7만59명이 기증의사를 밝힌 것에 비하면 2.5배 늘어난 수치다.
주 교수는 “나무 묵주 하나와 두 눈만을 남기고 떠나신 김 추기경님 덕분에 내 인생도 변하고 있다”고 했다. “추기경님이 백내장 수술로 병원에 입원하셨던 적이 있지요. 그 때 저는 멀리서 추기경님을 처음 뵈었어요. 환자복 위에 하늘색 윗 옷을 걸치고 수녀님 한 분과 단촐하게 걸어가시던 모습이었습니다.”
◆‘100’
주 교수는 제자들 사이에서 ‘완벽주의자 기질이 강한 무서운 스승’으로 통했다. 그는 “의사는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것보다 최고의 실력으로 환자에게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제자가 실수를 하면 그 자리에서 호통을 치고, 따끔하게 혼냈습니다. 일 중독자처럼 연구에 매달렸어요. 아침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도 일을 멈추는 게 싫어 저녁이 되어서야 엉금엉금 걸어 간 적도 많았지요.”
지금까지 국제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에는 그가 쓴 논문 105편이 실렸다. 그는 “의사 생활을 하면서 늘 ‘SCI에 영어 논문 딱 100편만 등재하면 은퇴하겠다’며 ‘그 목표를 이루는 날, 제자들을 싹 모아서 잔치를 벌일 것’이라고 말해왔다”고 했다.
지난해 말, 주 교수는 100편째 논문을 실었다. 그는 “20년 넘게 ‘최고의 실력’만을 좇아 달렸는데, 꿈에 그리던 ‘100’이란 숫자가 점점 가까워 질수록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영어로 논문을 쓴다는게 너무 어려웠어요. 힘들어도 꾹꾹 참았습니다. 환자들에게 ‘더 잘할 수 있었는데…’하는 생각이 들면 밤에 잠도 못자고 끙끙 앓기도 했지요. 집에선 늘 수술 비디오를 틀어놓고 그것만 들여다 봤더니 어느새 훌쩍 큰 두 아들과도 데면데면 해졌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고요.(웃음)”
◆김 추기경이 남기고 간 것들
3개월쯤이 지났을 무렵, 주 교수는 서울성모병원의 안센터장으로 김 추기경의 안구 적출과 각막 이식 수술에 나서게 됐다. “원래 ‘안구적출’은 전공의들의 몫이에요. 그동안 저는 적출해온 안구에서 각막을 이식하기만 하면 되었구요. 안구적출은 일반적으로 시신이 옮겨진 영안실에서 이뤄집니다. 30분 정도 걸리는 시술이지요. 복잡한 고난이도의 수술을 해왔던 저였지만, 당시 추기경께서 영면하신 병실로 들어가 안구를 적출하자니 너무나도 두려웠습니다.”
그는 “문득 ‘피가 많이 나오면 어떡하나’‘주변 조직이 상하면 어쩌지’‘이렇게 추기경의 몸에 손을 댔으면서 이식 수술 결과가 좋지 않으면 어떡하나’하는 걱정들이 꼬리를 물었다”고 했다.
그가 마주한 김 추기경은 사제복을 갖춰 입은 위엄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이 병원 9010호에서 추기경은 환자복을 입고, 마른 얼굴로 한 손에 나무 묵주를 쥔 채 세상과 소박한 작별을 했다. 주 교수는 “이후 순조롭게 수술을 진행했다”고 했다.
주 교수는 “요즘도 추기경의 각막을 이식 받은 대상자분들이 찾아와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그동안 논문에 치여 봉사라는 것은 아예 잊고 살았는데, 한해를 추기경과의 따뜻한 작별로 시작했더니 사회봉사활동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는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5일까지 저개발국 아동구호단체 월드쉐어와 함께 아프리카 케냐 케리쵸시에 있는 케리쵸지역병원에서 18명의 아이들에게 백내장 수술을 해주고 돌아왔다. 주 교수는 “병원에서 수술 기구를 알콜램프로 켠 불로 소독 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무뎌진 수술용 칼을 쓱쓱 불에 그을려 사용하는 이들을 보며 ‘나와 내 주변의 환경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만큼 풍족한 가’를 깨달았다”고 했다.
“그 곳에서 아이들이 흙바닥에 모포 한장을 깔고 살고 있었어요. 저는 의사는 최고의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누어 줄 수 있을 때 나눠야죠. 또 갈 수 있으면 또 갈 거에요. 2009년은 제 인생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 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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