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에서 돌아온 영화 ‘시’의 주인공 윤정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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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0-06-19 12:20 조회3,4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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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직 청춘… 원로배우 아닌 그냥 배우로 불러주세요”
칸이 반한 한복, 70만원 주고 직접 맞춘 것
 
그날 칸의 레드카펫에서는 연분홍 치마가 ‘시’를 타고 휘날렸다.

영화 ‘시’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 윤정희씨. 66세의 배우 윤정희씨는 지금 한국여성에게 여러 면에서 희망의 증거가 되었다. 윤씨가 지난 5월 19일 프랑스 칸 영화제의 레드카펫에 섰을 때 세계는 그가 입은 한복에 매혹되고 말았다. 쪽빛 저고리에 연분홍 치마, 그리고 단아한 올림머리! 은은하고 기품이 있는 한국미의 정수를 보는 듯했다.

이창동 감독의 ‘시’는 한국 사회의 여러가지 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다. 이혼 가정, 노년의 성, 치매, 성폭행, 컴퓨터 게임 중독…. 그리고 인간에 내재한 예술적 본능.

간병인으로 일하며 홀로 손자를 키우는 평범한 60대 여성 미자는 우연히 문화센터에서 시 작법(詩 作法) 강좌를 듣게 된다. 그런데 중학생 손자가 집단 성폭행에 가담해 또래 여중생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병원에서 알츠하이머(치매) 초기로 진단받은 미자는 사건 수습을 위해 허둥대면서도 한편으로 시작(詩作)에 몰두한다. 시작과 사건은 마치 만나지 않는 철로처럼 평행선을 달린다. 미자가 눈물로 쓴 생애 첫 시는 죽은 여중생을 위한 헌시(獻詩)였다. 할머니는 죄의식을 못 느끼는 손자를 대신해 시로 용서를 빌었다. 비로소 관객들은 영화의 타이틀 장면에서 익사체 위로 ‘시’가 떠오른 까닭을 깨닫는다. 기자는 영화관에서 ‘시’를 보고 여러 날 가슴이 먹먹했다.

윤씨는 칸 영화제 이후 축하 인사를 받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윤씨를 6월 3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만났다. 윤씨는 11시30분에 정진석 추기경과 약속이 잡혀 있으니 명동성당에서 만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윤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세례명은 ‘소화(小花) 데레사’. 영화배우가 되기 전 명동성당 성가대로 활동했을 만큼 명동성당과는 인연이 깊다. 인터뷰는 성당 내의 한 사무실에서 1시간 동안 진행됐다.

1967년 ‘청춘극장’ 데뷔 이후 칸 영화제는 처음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동안 칸에는 여러 번 가봤을 텐데, 이번에 배우로 초청되어 가니 기분이 어땠나요. “남편(백건우)이 음악하니까 오케스트라 협연하러 칸에 많이 가봤어요. 영화제가 열리는 페스티벌 홀에서 남편이 연습을 많이 했거든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둘이만 있을 때는 아무런 맛이 없는 홀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제가 열려 홀에 영화인들이 모이니까 그렇게 분위기가 다르고 화려해질 수가 없는 겁니다. 참,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칸을 여행할 때 솔직히 ‘나도 칸 영화제에 초대받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나요.“배우로 오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파리에서 칸 영화제 관련 기사를 보면서 그런 생각 안 들었나요. “어떤 영화가 출품되나 하고 관심은 가졌지만 내가 나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해봤어요.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네? 왜 그런 생각이 안 들었을까요? 꼭 거짓말 같죠?(웃음)”

‘시(詩)’가 시나리오상을 받은 결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기분 좋죠. 영화의 기초이자 주춧돌이 시나리오잖아요. 아주 기쁜 상이죠. 평들이 다 좋았잖아요. 연기자들도 잘했고요. 모든 사람이 다 잘 맞춰져서 칭찬을 많이 받았죠.”

솔직히 여우주연상을 기대하지 않았나요. “칸으로 떠나기 전에는 황금종려상을 꿈꿨어요. 황금종려상은 ‘시’를 위해 고생한 모든 식구들에게 주는 상이잖아요. 그러나 여우주연상은 나한테만 주는 상이니까요. 영화를 본 사람들이 황금종려상감이라는 얘기도 했고…. 5월 19일에 시사회를 했는데 스탠딩 오베이션(기립 박수)을 두 번이나 받았어요. 미자에 대한 호평이 이어졌고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 내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울 때는 그런 마음이 들기도 했죠.”

여우주연상이 줄리엣 비노시에게 갔을 때 솔직히 서운하지 않았나요. “칸 영화제에서는 원래 한 작품에 상을 두 개 안 줘요. 사실 저는 황금종려상이나 여우주연상을 생각했죠. 하지만 남편도 저도 상에 처음부터 마음 쓰지 말자고 했습니다. 시나리오상은 생각 못했어요.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는데, 시나리오상을 탔으니 최고죠. 일부 외국 기자들은 내게 ‘당신 이름을 기다렸다’고 말해주기도 했어요. 심지어 팀 버튼도 내게 와서 칭찬을 해줬고 세계 언론들도 호평을 했기 때문에 그걸로도 고마워 해야죠.”

줄리엣 비노시가 찾아와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는데 무슨 얘기를 나눴나요. “축하한다는 얘기만 주고 받았어요. 특별한 얘기를 나눌 상황이 아니었어요. 사실은 나도 줄리엣 비노시가 탈 거라고 예상했어요. 칸 영화제 포스터에 나왔고, 프랑스 배우이고 스타니까. 솔직히 놀라지 않았어요.”

칸에서 입은 한복과 헤어스타일이 여전히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크리스챤 디올에서 머리 협찬을 제의 받았는데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머리와 화장은 원래 제가 다해요. 동양 얼굴에 맞는 헤어 스타일과 화장은 제가 더 잘 알지 않나요? 그걸 프랑스 사람이 어떻게 알죠? 머리에 꽂는 핀도 다 한국에서부터 준비해 갔죠. 나의 모습을 지키겠다고 생각한 거죠.”

원래 협찬 받는 것을 싫어하십니까. “아니,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거니까, 내가 하겠다고 한 거죠. 화장은 원래 내가 해왔어요.”

한복 콘셉트는 원래 남편 백건우씨가 추천했다고 알려졌는데요.   “처음부터 가족끼리 한복을 입기로 합의했어요. 남편과 나는 당연하고 엄마, 동생, 딸이 전부 한복 입자고 했지요. 한복이 얼마나 아름다운데요. 아시잖아요? 하지만 옷감 고르는 것은 직접 가기가 그래서 남편과 동생이 가서 골라왔고 제가 좋다고 했죠. 그런데 집에서 가봉을 했는데 안 맞는 거예요. 하는 수 없이 위약금을 물고 여의도의 다른 한복집에 가서 다시 맞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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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19일 칸 영화제 레드카펫에 선 윤정희와 이창동 감독(오른쪽). / photo 연합뉴스
한복을 장만하는 데 비용은 얼마나 들었습니까. “잠깐만요, 동생한테 물어보고요.” 

(윤정희씨는 휴대폰을 꺼내 동생과 통화를 했다.)

“70만원이라는데요, 비싼 건가요?”

윤정희씨는 한창 영화를 촬영 중이던 지난해 11월 9일 주간조선과 인터뷰를 했다. 윤씨는 그때 “한국 최고의 배우는 김승호와 황정순”이라고 말했다. 고인이 된 김승호의 아들 김희라씨는 영화에서 미자의 간병 대상 노인을 연기했다. 실제로 김희라씨는 뇌졸중을 맞아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 영화에서 미자는 중풍을 맞아 거동이 불편한 노인과 목욕탕에서 관계를 갖는 장면을 연기했다.

김희라씨의 연기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김희라씨의 연기가 기막혔어요. 바로 본인의 모습이기도 했으니까. 저는 다른 사람은 그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봅니다.” 

프랑스에서 보고 느낀 ‘노년의 성(性)’은 어떻습니까. “그건 개인적인 것이라 제가 알 수가 없죠. 하지만 건강한 노인들의 경우, 성은 진행형이죠.”

우리나라에서는 노년의 성을 터부시해온 경향이 있습니다. 노인이 성적 욕망을 드러내면 노망이 들었다, 주책이 없다고 핀잔하고. “그러면 안되죠. 그건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인데….”

영화에서 손자는 죄의식을 못 느끼는 것으로 나옵니다. 무엇이 손자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보십니까. “두 가지라고 생각해요. 하나는 느꼈으면서도 표현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요. 다른 하나는 ‘여섯 명 중의 하나인데’ 하면서 아예 죄의식을 안 느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다윗이 손자 연기를 아주 잘했어요. 밥 먹으면서 식탁에 놓인 죽은 희진의 사진을 봤는데, 인간인 이상 왜 속이 터지지 않았겠어요. 근데 말을 안 해요. 이불 끌어안고 침대에 누워있을 때 걔가 할머니에게 뭐라 말하겠어요.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라고 봐요.”

혹시 손자가 컴퓨터 게임의 폭력성에 중독되어 인간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보지 않나요. “그렇게는 생각을 못해봤어요. 파리에서는 PC방을 본 적이 없는데, 우리나라에 오니까 정말 PC방이 흔하데요. 기술 발전과 컴퓨터 게임 발전이 자랑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면에는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저는 인터넷을 사용하면 편리한 점이 있다는 건 알지만 컴퓨터를 쓸 줄 모릅니다. 거기에 시간을 너무 많이 뺏기잖아요. 나는 아직도 잉크 냄새 맡으면서 신문을 보는 걸 더 좋아합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사진도 금방 보내던데, 동생에게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시’를 찍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장면은 어떤 것이었나요. “죽은 여중생의 엄마 희진을 만나러 갈 때였죠. 이건 연기가 아니라 ‘진짜 나 손미자’라고 생각하고 너무 잘하려고 하다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두 번째는 희라씨와 목욕탕 장면이었고, 세 번째는 시 강좌 시간에 ‘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말할 때였죠. 세월이 흘러서 그런지 미자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요.”

요즘 배우들은 보톡스 주사를 하도 많이 맞아서 섬세한 표정연기가 안 나온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메릴 스트립은 나이 들며 생기는 주름을 그대로 두어서 표정 연기가 살아있다고 하더군요. “그런가요? (웃음) 이창동 감독님이 ‘윤 선생님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주름이 있어 너무 좋다’고 말하대요.”

일부 영화 기자들은 윤정희씨를 ‘원로배우’ ‘전설적인 여배우’라고 쓰던데요. “나를 너무 멀리 보는 느낌이에요. 아직 원로라는 말은 좀 그렇네요. 제가 죽었어요? 전설적인 여배우라고 쓰게.(웃음) 우리나라에서는 세대를 너무 빨리 넘겨보는 것 같습니다. 내 나이가 만 66세지만 난 아직 청춘이라고 생각하는데. 세월은 흘러도 마음은 젊어질 수 있잖아요. 그냥 배우라고 불러줬으면 해요.”

프랑스에서는 나이 많은 배우를 어떻게 부르나요. “톱스타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배우 하나로 통칭합니다. 원로배우 라는 말은 안 쓰죠. 우리나라에선 너무 나이를 의식하는 것 같습니다. 그건 반대예요.”

윤씨는 이렇게 말하곤 핸드백을 열고 자신에 대해 쓴 프랑스 신문 기사 두 건을 책상 위에 내놓았다. ‘르 몽드’지에는 한국 배우 윤정희라고만 되어 있었다.

최근에 나온 한국 영화 중 ‘시’가 보기 드물게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흥행에도 성공할 것으로 봅니까. “열심히 ‘시’를 홍보 중이에요. 젊은 친구들과 우리 세대가 ‘영상의 문학작품’을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하지만 이 영화에는 자극적인 요소가 없어요. 그래도 본 사람은 두 번, 세 번 본다고 해요. 그러면서 입소문을 내고 있죠. ‘시’는 프랑스에서도 개봉되는데 제작비를 댄 프랑스 회사 측에서 제가 무대 인사와 언론 인터뷰에 응하면 한국에서보다도 더 좋은 반응을 얻을 거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6월 9일에 영화 홍보차 파리에 갑니다. 포지티브라는 영화 잡지에서 표지 사진을 찍기로 되어 있거든요.”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시’를 봐야 하는 이유를 간단히 설명해주시지요.“타이틀이 ‘시’지만 시를 배경으로 미자의 삶을 그린 영화예요. ‘시’라는 것에 겁을 먹지 말고 단편소설 읽는다는 생각으로 봐줬으면 해요. 시를 배경으로 한 여자의 일생! 아름다움을 꿈꾸는 도덕적 양심이 있는 여자가 미자예요. 어떤 사람은 손자를 신고한 미자를 비난하기도 하지만 손자를 사랑한다면 손자의 도덕적 양심을 되찾아줘야 한다고 봅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아름답고 슬픈 영화죠.”

‘시’의 호평으로 다른 작품 제의도 들어올 것 같습니다. “이창동 감독으로부터 ‘시’를 제의받았을 때 동시에 다른 시나리오도 들어왔어요. 제가 ‘시’ 때문에 선택을 안 했지만 그 작품도 정말 좋았어요. 다음 작품은 아무래도 ‘시’의 미자를 떠나보낸 다음에 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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