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실 2주기'… 조성민, 입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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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0-10-09 16:52 조회5,981회 댓글0건본문
"나쁜 놈? … 내가 아니라고 하면 사람들이 믿겠나"
내가 목숨 걸고 사랑한 여자
부모님이 결혼 반대했을 때 수면제 두 병 털어넣어…
이 남자만큼 여자들에게 '공공의 적(敵)'이 된 남자가 있을까? 이 남자만큼 웃는 낯보다 우울한 낯으로 카메라 세례를 받은 남자가 세상에 또 있을까?
조성민(37) 말이다. 1990년대 대한민국 고교야구를 주름잡은 최고의 투수였고, 한국 프로야구 출범 이후 투수로는 최초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해 한국 야구의 저력을 보여줬던 선수. 하지만 조성민이란 이름엔 '야구인'이라는 수식보다 '최진실의 전 남편'이라는 꼬리표가 더 잦게, 당연하게 따라붙었다. 2000년 12월 '세기의 결혼식'이란 축복 속에 스타커플의 탄생을 알렸지만, 결과적으로 조성민에겐 치명적인 상처이자 지독한 고통으로 남았다.
2008년 10월 최진실의 자살은 그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붙였다. 최진실의 재산권 논쟁에 휘말리면서 갖은 비난을 받았고, '여론재판'에 의해 아버지가 자식의 친권을 포기한다고 발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필이면 현역 선수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막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다. 충격과 죄책감 속에 모든 일을 접었다. 말문도 닫았다. 조용히 세상에서 잊혀지기만을 바랐다.
그런 조성민이 요즘 매스컴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 지난달 29일엔 아들 환희와 함께 야구 경기를 관람하며 오순도순 대화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2일 열린 최진실 추모 2주기 예배에 참석한 그는 오열하는 고인의 어머니를 부축하며 함께 울고 있다. 그와 남은 가족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사람들에겐 약간의 혼란이 생겼다. 조성민은 정말 '나쁜 남자'이기만 했던 걸까? 분명한 건, 예전보다 그의 모습이 훨씬 편안하고 안정돼 보인다는 것이다. 세월도 흘렀다.
환희는 야구에 재능 있어, 딸 준희는 왈가닥
야구 외적인 질문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뒤, 4일 오후 조성민이 대표이사로 있는 서울 강남의 'SMC21 스포테인먼트'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조성민은 자신의 못다 핀 야구인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마치 한풀이를 하듯. 실제로 4시간여의 인터뷰 중 3분의 2가 야구에 관한 것이었다. '마음 약한', 아니 적어도 '잔머리는 굴리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 이 남자는, 최진실과의 사랑, 환희·준희의 근황, 그리고 일련의 사건들이 낳은 악소문들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기사가) 어떻게 나가든 또 욕을 먹을 테고, 땅바닥이 아니라 지하 수십층까지 파고들어가 처박혔던 터라 이제 크게 아프지도 않다"고 웃으면서. 환희와 준희에 관해 이야기할 때 표정이 가장 밝았고, 최진실을 추억하는 대목에서 목이 살짝 메었다.
―아들과 야구 경기 관람하는 모습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다.
"환희와 함께 야구한 건 애들 엄마(최진실) 세상 떠난 2년 전부터다. 경기를 관람한 건 이번이 처음이고. 아이들 보고 싶으면 주일에 애엄마가 환희·준희 데리고 생전에 다녔던 교회에 갔다. 애들 얼굴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교회 다닌 셈이다. 거기서 교회 아이들과 어울려 야구하며 놀았다."
―야구에 소질이 있어 보이던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볼을 잡은 셈인데 3, 4학년 형들한테 던지는 공이 예사롭지 않더라. 마구잡이로 던지는 것 같으면서도 한번 제대로 '빵!' 하고 들어가는데 공에 힘이 있었다. 내성적이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다."
―환희가 야구선수 하고 싶다고 하면?
"저만 좋다면야. 숙제 봐줄 때 보면 공부도 곧잘 할 것 같다. 똑똑하고. 하지만 학교 공부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 공부가 사회 나와 다 써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더라. 내가 운동선수여서 그런가? 뭐가 되든지 간에 자기가 선택한 분야에서 정상에 서봤으면 좋겠다."
―둘째 준희는 오빠보다는 매스컴을 덜 탔다. 어떤 아이인가?
"환희는 순둥이인데, 준희는 왈가닥이다. 두 살 아래인데도 오빠랑 키가 비슷해서 만날 싸운다. 가끔 누나네 아이들까지 다섯이 모이면 집안이 들썩한 게 정신이 하나도 없다."
―엄마 얘기는 안 하나?
"글쎄. 내 앞에선 잘 안 한다. 엄마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 그 상처 사라지지 않겠지만 치유시키는 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다."
―이혼할 때 친권, 양육권을 모두 넘겨줬고 이후로도 아버지 역할을 별로 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월이 흐르니 '부성(父性)'이 싹트는 것인가.
"환희 태어났을 때 목욕시키고 기저귀 가는 거 다 내가 했다. 일본, 한국을 오가며 만나야 해서 더 애틋했다. (별거 중에 태어난) 둘째는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니 만날 수 없었고 돌봐주지도 못했다. 요즘도 볼 때마다 미안하고 안쓰럽다. 다른 부모들 해주는 것 이상으로 사랑을 쏟아주고 채워주고 싶다. 어디 가도 주눅들지 않게."
―얼마나 자주 만나나. 고인의 어머니와는 화해한 건가?
"1주일에 한번은 꼭. 화해? 악수하며 공식적으로 화해한 건 아니다.(웃음) 어머님도 아이들 편하게 보게 해주신다. 진로 상담도 하시고. 연세가 있으신데 힘드시지 않겠나. 그분의 마음이 어떤 건지는 모르지만, 나라도 의지가 될 수 있다면 곁에 서드리고 싶다."
아이들 姓, 법원에 그렇게 호소했는데…
―2008년 5월 법원 판결로 두 아이의 성(姓)과 본(本)이 엄마의 성인 최씨로 바뀌었다. 마침 여성계의 숙원이었던 호주제 폐지가 이뤄진 시점이라 뉴스가 컸다. 한데 기사 어디에도 아버지 조성민 얘기는 없더라. 아이들 성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뜻이었나?
"난 매우 보수적인 남자다. 아이들 성이 바뀌는데 대한민국 어떤 아버지가 그냥 보고만 있겠는가. 법원에 참고인 자격으로 가서 4시간 동안 호소하고 하소연했다. (성 변경 신청을) 받아들이면 안된다고. 결과가 나오던 날 빈속에 소주 4병을 30분 만에 들이붓고 울었다. 만취해 길바닥에 자빠지고 부딪혔는지 손가락이 부러지고 얼굴에 상처가 났더라."
―같은 해 10월 최진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재산권 논쟁에 휘말렸고, 아버지 역할도 안 했던 사람이 재산을 탐낸다고 해서 전국민적인 지탄을 받았다.
"내가 탐낼 만큼 애 엄마에게 그렇게 많은 돈이 있었나? 솔직히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남의 것에 욕심 내는 사람이 아니다. 일확천금에도 별 관심없다. 복권이니 경품이니 하는 것에 한번 당첨된 적도 없다. 소띠이고, 그래서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팔자라고 늘 생각해왔다. 지금도 억울하다."
―결백했다면 끝까지 맞설 수 있지 않았을까.
"내 인생에 가장 힘든 시기였다. 땅바닥이 아니라 지하 17층까지 파고 내려가 처박힌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았다. 방어를 할수록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고 나를 찔렀다."
―그래서 친권, 양육권까지 스스로 반납했나.
"더 이상 버티면 아이들만 힘들어지고 다칠 것 같았다."
―친권박탈을 주장했던 사람들, 여성단체들이 원망스러웠겠다.
"우리 집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들이 나보다 더 잘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 게…. 아니라고, 속마음을 까 뒤집어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마지막엔 항변할 힘도 없어 입을 다물기로 했다. 모두 지난 얘기다. 부탁인데, 제발 야구 얘기로 돌아가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찬호 따라 미국 가고 싶었다
조성민은 여섯 살 때 야구공을 잡았다. 은행원이지만 학창시절 연식정구 선수였던 아버지가 사다준 장난감 공이었다. 한국 프로야구시대가 개막돼 대한민국 전역에 야구 붐이 한창이던 때. 동네 개구쟁이들 몰고 다니면서 혼자 투수하고, 1번 타자하고, 감독까지 도맡다가 4학년 때 둔촌초등학교 야구부에 들어갔다. "반마다 돌며 야구부 후보생 모집하던 체육 선생님이 '야구 해보고 싶은 사람?' 하시기에 나를 포함해 몇이 손을 번쩍 들었는데 키가 커 맨 뒤에 앉아 있는 나를 지목하면서 '너는 꼭 와라' 하시더라."
투수 조성민이란 이름이 스타덤에 오른 건 신일고 3학년 때다. 큰 키(194㎝)에서 빠르게 내리꽂히는 강속구로 그해 봉황기, 황금사자기 고교야구 우승을 견인했다. 임선동(휘문고), 박찬호(공주고)와 함께 한국 고교야구의 '빅3', '황금의 92학번'으로 통했고, 고려대에 입학해서는 국가대표 에이스로 맹활약했다. 1996년엔 일본 프로야구 명문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 다시 한번 화제를 뿌렸다. 입단 후 1년 반 동안은 2군에서 뛰었지만 97년 후반 1군으로 복귀, 화려한 전성기를 꽃피우기 시작한다. 시속 150㎞에 이르는 강속구와 포크볼, 싱커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완봉승, 완투승을 이어갔다. 하지만 2년을 채우지 못했다. 98년 일본 올스타 전에서 팔꿈치 인대가 끊어지는 큰 부상을 당했고 수술과 재활을 반복하다 계약 만료 기간을 1년이나 남긴 2002년 10월 스스로 요미우리 유니폼을 벗는다.
―꿈의 무대인 미국 메이저 리그로 가지 않고 왜 일본으로 갔나?
"온통 메이저 리그 생각뿐이었다. 찬호가 한양대 2학년 마치고 그해 겨울 LA다저스로 먼저 떠났고, 3학년이 되자 내게도 메이저 리그 여섯 군데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왔다. 그런데 아버지가 대뜸 일본 최고 명문인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이미 가계약까지 하셨다면서. 황당해하는 나를 아버지가 설득하더라. 메이저 리그로 가면 찬호 뒤차 타는 것밖에 더 되냐, 일본 갔다가 미국 가도 늦지 않는다. 신라호텔에 방 잡아놓고 구단측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협상했다. 연봉은 1억6000만원으로 결정했는데 계약기간 때문에 옥신각신하다 너무 배가 고파, 걔들이 원하는 8년으로 하고 도장 찍었다."
―어느 인터뷰를 보니 요미우리에서 '왕따'를 당했다고 했더라.
"선수들 말고 코칭 스태프들로부터다. 연습하러 운동장 나갈 때 인사를 하면 본체만체하더라. 영어권에서 온 선수들한테는 멀리서도 반갑게 알은척하고 등도 두드려주면서. 올스타전 팔꿈치 부상만 해도 감독과 코치의 배려가 있었으면 막을 수 있었다. 팔이 처음 뒤틀렸을 때 교체해달라 호소했는데 일본 투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바꿔주지 않았다."
부잣집 아들이라 헝그리정신이 없다고?
―투수는 팔이 생명인데, 승부를 떠나 끝까지 교체를 주장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욕심이었다. 기분 더럽지만 끝까지 마무리하자, 뭐 그런 욕심. 내가 미련해서 요미우리 입단 직후부터 그렇게 무모했다. 입단 첫해 스프링 캠프에서, 신인선수 연습하는 거 본다고 취재진은 구름처럼 몰려들지, 감독은 포수 뒤에서 바라보고 있지, 오로지 잘 던져야 한다는 생각에 몸도 안 만들어진 상태에서 강속구를 던지니까 몸이 여기저기 고장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1군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에 오버를 하니 공도 130㎞대밖에 안 나오고, 시범경기에서도 번번이 패전투수가 됐다. 2군행 통보 받고 도쿄 아카사카의 삼겹살 집에서 눈물의 소주를 마셨다."
―그래도 2년에 가까운 전성기를 꽃피웠고 인기도 한몸에 누렸다. 계약기간이 1년이나 남았는데 스스로 옷을 벗은 것은 '포기'로 보일 수 있지 않나.
"들어봐라. 2군에서 몸 다시 만들고 감각 찾아서 잘 던지기 시작하면 1군에서 부른다. 4일 동안 시합에 끌고는 다니는데 그라운드에 내보내지는 않는다. 그리고 다시 2군으로 보낸다. 1군으로 불려와 승리투수가 되어도 이후의 등판 스케줄은 주지 않는다. 나보다 성적이 나쁜 일본투수들이 허다한데 그들은 2군으로 가지 않는다. 지금 (이)승엽이가 그런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같은 악조건을 견뎌낸 선수들도 많았을 텐데. 부잣집 아들이라 헝그리정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더라.
"우리 집 부자 아니다. 아버지 은행 다니면 다 부잔가(그의 아버지는 은행지점장을 지냈다). 누구도 그 고통 겪어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성격까지 이상해질 정도였다."
―얼마 전 박찬호가 124승을 올리며 메이저 리그 아시아인 최다승을 기록했다. 야구 전문가들은 고교야구 때 '빅3'라고 통칭하기는 했으나 제구력에 관한 한 조성민이 박찬호보다 한 수 위, 아니 월등했다고 하더라.
"찬호가 원래 투지가 강하고 노력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다. 자기 관리에도 철저하고. 그의 성공은 당연한 것이다."
―박찬호에게는 뚝심, 성실이라는 표현이 따라붙고 조성민 앞에는 '풍운아'란 말이 따라붙는다.
"내가 뺀질뺀질하게 생겨서 노력을 안하는 선수처럼 보인다.(웃음) 무식하게 달려드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이만큼 해야 한다 목표를 정하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 ▲ 지난달 29일 조성민이 아들 환희와 함께 잠실야구장을 찾아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1차전을 관람하는 모습이 스포츠지 카메라에 잡혔다. 조성민은“환희와 함께 야구경기를 보러 간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2년 전부터 교회에서 아들과 야구공을 주고받으며 놀았다”고 했다. / 스포츠 칸 제공
최진실, 내 인생에 목숨 걸고 사랑했던 유일한 여자
―부상으로 재활치료에 한창이던 2000년 최진실과 결혼했다. 일부 야구인들은 그 화려했던 연애와 결혼이 조성민의 야구인생을 단명시켰다고도 한다. 최진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인생에 '가정(假定)'이란 없다. 가지 않은 길? 소용없다. 나의 선택이었고, 어떤 결과였든 내 탓이고 내 책임이다. 연애하느라 재활에 집중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만나야 했고, 떨어져 있다 보니 불안했다."
―뭐가 그렇게 좋았나?
"연예인 같지 않아서. 옆집 누나처럼 털털하고 편안했다. 집에 놀러가면 뚝딱뚝딱 음식도 금세, 맛있게 만들어주고."
―부모님이 엄청 반대한 걸로 알고 있다.
"이건 한번도 말한 적 없는데…. 수면제를 두 병 털어넣고 술과 함께 마셨다. 그래도 항복 안하셨다. 허락 안하셔도 결혼했을 거다. 어차피 내가 데리고 살 사람인데. 안 그런가?"
―그렇게 좋아했는데 왜 헤어졌나?
"서로를 잘 몰랐다. 2년이나 사귀었지만 떨어져 있었으니 실제 만난 시간은 짧았고. 애엄마는 애엄마대로 스타연예인으로서 주위에서 받아온 융숭한 대접을 남편에게 바랐을 수도 있다. 재활치료하면서 운동선수로서 절박한 상황이었던 나 또한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를 바랐을 테고. 서로가 한 발씩 양보하고 이해했더라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거다."
―대화로 풀면 되지 않나?
"어련히 알겠지, 했다. 그런 바람들 딱 집어서 얘기 안하면 모른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오해와 불만만 쌓였던 것 같다."
―그래도 폭행설은 치명적이다.
"나는 때리지 않았다."
―사진까지 공개되지 않았나.
"(주먹을 쥐어보이며) 내가 이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으면 (사진에서처럼) 눈자위에만 동그랗게 멍이 들었겠나. 그만하자."
별거 중이던 두 사람은 2004년 8월 폭행전 공방에 휩싸인다. 아들 생일을 축하해주러 최진실의 잠원동 집에 갔다가 말다툼이 생겼고 이것이 폭행으로 번졌다는 얘기다. 최진실측은 조성민에게 일방적인 폭행을 당했다며 사진까지 공개했다. 이날 인터뷰에서 조성민은 "내가 진짜 때렸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하고 허탈하게 웃으며 당시 정황을 설명했지만, 언론 공개는 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극적으로 치달았던 것 또한 서로가 지독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면서. 폭행설이 있었던 그해 9월, 이들은 합의이혼한다.
―2008년 최진실의 자살 소식을 접한 순간 뭘 하고 있었나.
"출근길인데 생판 모르는 연합뉴스 기자가 전화했더라. 장난하는 줄 알았다. 내가 아는 최진실은 그렇게 갈 사람이 아니었다. 나 보란 듯 씩씩하게 살 줄 알았다. 슬픔 이전에 충격이었다."
―3일 내내 빈소를 지켰다. 많이 울더라. 죄책감, 주위의 따가운 시선도 있었을 텐데.
"죄책감보다는 미안함 때문에 괴로웠다. 빈소에 서서 그간 하고 싶었던 말들을 했다. 미안하다고. 그 사랑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환희 임신해서 4개월 동안 일본에 함께 있으면서 배 마사지 해주고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던 때가 떠오르더라. 내 인생에 그렇게 목숨 걸고 사랑했던 여자는 없었다."
―죽음을 택할 만큼 그녀가 힘들었다는 걸 몰랐나.
"세상 버리기 두 달 전쯤 새벽에 전화를 걸어왔다. 평소와 달리 기운 없는 목소리였다. '자고 있었어?' 하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내일 다시 할게' 하더라. 전화 끊고 느낌이 이상해 핸드폰에 찍힌 번호(서울지역 호텔 전화번호였다)로 걸었더니 받지 않았다. 그 전화를 받아 이야기를 들어줬어야 했다."
내 인생은 지금 5회말, 재역전의 기회는 있다
―결혼, 이혼, 사업실패 등 잇따른 불행을 겪었지만 '야구선수 조성민'으로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김인식 감독의 배려로 2005년 한화 유니폼을 입었다. 마지막 기회라는 다짐에 등번호 '99'번을 달았다. 어깨 수술까지 해가며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더라. 구속 140㎞만 나왔어도 찬호처럼 계속 던졌을 거다. 2007년 시즌 끝나고 플레이 오프 들어갔을 때 마음을 정리했다. 시즌 끝나면 선수들을 방출하는데, 내가 빨리 결정해주면 후배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런데 구단측이 단 한 번의 만류도 없이 '그래?' 하고 받아들이더라. 좀 섭섭하긴 했다.(웃음)"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나와 한국으로 돌아온 조성민은 슈크림빵 체인사업을 하다 다시 야구 인생에 도전한다. 2003년,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국내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 신청을 했고, 2005년 한화에 입단한다. 성적표는 초라했다. 35경기, 3승4패, 4홀드, 방어율 5.09. '역부족'이라고 느낀 그는 2007년 34세의 나이로 현역 선수생활을 사실상 마감한다.
―한국 야구계가 조성민을 버렸다고 생각했나?
"한화 때는 아니다. 한국 돌아와 2003년, 2004년에 신인 드래프트 신청을 했을 때 어느 곳에서도 지명해주지 않더라. 야구인생 20년을 만들어온 조성민이라는 이름이 2년간의 순조롭지 못했던 결혼생활로만 평가받고 내쳐졌다는 생각에 절망했다. 야속했다. 그때의 공백만 없었더라도 …."
―그래도 여전히 야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해설자로도 활약하고, 야구 관전평도 쓰고. 평이 꽤 좋더라.
"SMC21 스포테인먼트는 야구 관련한 교육사업을 주로 한다. 이번 겨울엔 초등학생, 중학생들과 함께 영어야구 캠프를 떠난다. 해설은 재미있게 하려고 노력한다. 일본 야구 해설을 좋아들 하시던데, 솔직히 청중 입장에서는 지루할 수 있는 언변이다. 관전평 쓰는 건, 어렵지만 보람 있다. 그래도 야구선수로 뛸 때가 가장 좋았다."
―포스트 시즌이 한창이다. 한국 야구에 쓴소리 하기로 유명하던데.
"좀 더 정교해져야 한다. 투수를 예로 들면 단지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밀어넣는 게 아니라, 스트라이크 존을 9칸으로 나눈 뒤 각각의 위치를 자유자재로 공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보다 더 시급한 건 야구계 체질 개선이지만. 한창 기량을 쌓아야 할 아이들이 대학 가고 프로에 가려고 야구를 하고 시합을 뛴다. 우승을 나눠먹기 한다. 그러니 아마추어 야구가 죽는 거다. 이렇게 가면 한국 야구 비전 없다. 야구가 정신력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러면 또 너나 잘하라고 악플 붙겠지만."
―이제는 댓글 같은 거 안 볼 것 같은데.
"아니, 본다. 어떤 댓글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 '나 조성민인데…' 하고 답을 달아주고 싶은데, '네가 조성민이면 나는 박찬호다' 하고 달려들까봐 안한다.(웃음) 물론 크게 신경쓰지는 않는다. 1000개의 댓글이 다 '조성민 나쁜 놈'이라고 욕해도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의 진심을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애엄마가 남겨준 교훈이다. 장례식장에서 내가 그랬다. '이 바보야.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그런 못난 짓을 했냐'고. 인생이 그런 거더라."
―여전히 준수한 외모를 지녔다. 여성 팬들도 많을 것 같고.
"어이구, 여자라면 이제 무섭다. 정말 무섭다."
―야구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실패해도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기회가 오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자가 9회말 최종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들을 하면서. 조성민의 인생, 반전의 기회를 다시 잡을 수 있을까?
"글쎄. 내 인생은 현재 5회말인 것 같다. 1회, 2회 고전하다 3회 초에 점수를 확 냈는데 4회말에 다시 역전 당하고 다시 역전의 기회를 노리는 5회나 6회? 그간의 시행착오를 스승삼아 열심히 살면, 충분히 재역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싶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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