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고아였던 어린이합창단 소녀 在美 성악가로 36년 만에 고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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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0-10-07 15:48 조회5,061회 댓글0건본문
▲ 7일 오후 서울 강서구 월드비전 선명회음악원 3층 강당에서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 1기인 김금자(61)씨가 후배들과 함께 합창 연습을 하고 있다. 입양돼 미국에서 자란 김씨는 9일 합창단과 함께 월드비전 창립 60주년 축하 공연 무대에 선다.
美 입양 성장 김금자씨
美 입양 성장 김금자씨
월드비전 60주년 맞아 내일 서울서 축하 공연 "합창단은 나의 친정"
7일 오후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월드비전 선명회음악원 3층 강당에서 김금자(61)씨가 "떡갈나무 숲 속에 졸졸졸 흐르는"이라고 시작하는 가곡 '아무도 모르라고'를 불렀다. 예순을 넘긴 소프라노 옆에서 중학생 합창단 30여명이 긴장된 표정으로 화음을 넣었다. 노래 연습을 마친 김씨는 "수십년 어린 후배들이랑 노래를 맞춰보니 가슴이 벅차다"고 말했다.
김씨는 6·25전쟁 고아들로 만들어진 선명회(宣明會·1999년 월드비전으로 이름 바꿈) 어린이 합창단 1기였다. 선명회는 1950년 6·25전쟁 때 종군기자 자격으로 한국에 온 밥 피어스(Bob Pierce) 목사가 전쟁고아와 여성들을 돕기 위해 만든 구호단체로, 통일교와는 무관하다.
김씨는 9일 오후 6시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까마득한 후배 합창단원 38명과 월드비전 창립 60주년 축하 공연을 한다. 미국 미시간대를 졸업하고 국내 독창회를 연 1974년 이후 36년 만에 서는 고국 무대다.
김씨는 6·25전쟁 고아들로 만들어진 선명회(宣明會·1999년 월드비전으로 이름 바꿈) 어린이 합창단 1기였다. 선명회는 1950년 6·25전쟁 때 종군기자 자격으로 한국에 온 밥 피어스(Bob Pierce) 목사가 전쟁고아와 여성들을 돕기 위해 만든 구호단체로, 통일교와는 무관하다.
김씨는 9일 오후 6시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까마득한 후배 합창단원 38명과 월드비전 창립 60주년 축하 공연을 한다. 미국 미시간대를 졸업하고 국내 독창회를 연 1974년 이후 36년 만에 서는 고국 무대다.
김씨는 6·25전쟁 때 부모를 잃었다. 강원도 철원에 살던 아버지는 북으로 끌려가 총살당했고, 어머니는충남 홍성으로 피란 가서 식당을 하며 4자매를 키우다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언니들은 일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고 여섯살 김씨는 홍성 보육원에 보내졌다.
1960년 선명회는 전국 보육원에서 노래 잘하는 전쟁고아들을 모아 합창단을 만들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김씨는 보육원장의 손에 이끌려 서울에 가서 오디션을 치르고 그해 8월 22일 32명 합창단에 뽑혔다.
합창단은 매일 3~4시간 이상 노래 연습을 했다. '6·25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후원자들에게 감사의 노래를 부른다'는 말에 교회, 방송국, 미군 부대는 물론 청와대까지 합창단을 초청했다. 합창단은 1961년엔 미국 44개 주 72개 도시를 돌며 공연했다.
노래를 잘해 솔로를 도맡았던 김씨는 1965년 3차 해외공연을 마치고 미국에 남았다. 예술에 재능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인터라켄 아트 아카데미(Interlochen Arts Academy)가 입학 제의를 한 것이다. 월드비전 미국 중부 책임자였던 제임스 프랭크(James E. Franks)씨가 김씨를 입양해 학교에 다니게 해줬다.
프랭크씨는 김씨 말고도 한국 고아 2명을 더 입양한 상태였다. 사회복지사인 프랭크씨 부부가 김씨를 뒷바라지하기에 음악은 돈이 많이 들었다. 김씨는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했지만,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방학이면 자동차 공장과 식당에서 일해야 했다. 김씨는 "어린 마음에 '난 왜 하필 이렇게 가난한 집에 입양됐을까' 하고 원망도 했다"며 "하지만 부엌에서 생활비 걱정에 몰래 눈물을 훔치시는 부모님을 본 뒤로는 더는 그러지 않았다"고 했다.
김씨는 어려운 형편에도 음악 공부를 계속해 주목받는 신인 오페라 가수가 됐다. 그린넬(Grinnel Operatic Competition) 같은 각종 콩쿠르에서 입상했고 유럽과 미주 지역을 돌며 공연도 했다. 그러나 김씨는 뉴욕시티 오페라단 입단을 앞둔 1980년 오페라 가수의 길을 접어야 했다.
"그 무렵 교회를 돌며 성가 공연을 많이 했는데, 성가는 음역이 낮아 콜로라투라(가장 높은 음을 내는 소프라노)의 기능을 잃게 됐죠. '성가를 버리든지 오페라를 그만두라'는 교수님 말씀에 오페라를 포기했어요." 김씨는 1980년 아이오와 대학의 제의로 음대 교수가 됐지만, 1982년 결혼하고 4년 뒤 자녀 교육을 위해 교수를 그만뒀다. 그 뒤로는 두 아들을 키우며 교회 성가대나 동창 모임 등에서 가끔씩 노래를 부르며 음악을 그만둔 아쉬움을 달랬다.
김씨는 9일 공연을 앞두고 귀국했지만, 지난주 병원에서 당뇨로 각막에 출혈이 심해 수술을 받았다. 공연 당일 아침에도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김씨는 "합창단은 저를 새로운 세상에 보내준 친정이라 소리를 낼 수 있는 한 반드시 무대에 설 것"이라며 "그래야 좀 더 성공한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 미안함을 떨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1960년 선명회는 전국 보육원에서 노래 잘하는 전쟁고아들을 모아 합창단을 만들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김씨는 보육원장의 손에 이끌려 서울에 가서 오디션을 치르고 그해 8월 22일 32명 합창단에 뽑혔다.
합창단은 매일 3~4시간 이상 노래 연습을 했다. '6·25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후원자들에게 감사의 노래를 부른다'는 말에 교회, 방송국, 미군 부대는 물론 청와대까지 합창단을 초청했다. 합창단은 1961년엔 미국 44개 주 72개 도시를 돌며 공연했다.
노래를 잘해 솔로를 도맡았던 김씨는 1965년 3차 해외공연을 마치고 미국에 남았다. 예술에 재능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인터라켄 아트 아카데미(Interlochen Arts Academy)가 입학 제의를 한 것이다. 월드비전 미국 중부 책임자였던 제임스 프랭크(James E. Franks)씨가 김씨를 입양해 학교에 다니게 해줬다.
프랭크씨는 김씨 말고도 한국 고아 2명을 더 입양한 상태였다. 사회복지사인 프랭크씨 부부가 김씨를 뒷바라지하기에 음악은 돈이 많이 들었다. 김씨는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했지만,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방학이면 자동차 공장과 식당에서 일해야 했다. 김씨는 "어린 마음에 '난 왜 하필 이렇게 가난한 집에 입양됐을까' 하고 원망도 했다"며 "하지만 부엌에서 생활비 걱정에 몰래 눈물을 훔치시는 부모님을 본 뒤로는 더는 그러지 않았다"고 했다.
김씨는 어려운 형편에도 음악 공부를 계속해 주목받는 신인 오페라 가수가 됐다. 그린넬(Grinnel Operatic Competition) 같은 각종 콩쿠르에서 입상했고 유럽과 미주 지역을 돌며 공연도 했다. 그러나 김씨는 뉴욕시티 오페라단 입단을 앞둔 1980년 오페라 가수의 길을 접어야 했다.
"그 무렵 교회를 돌며 성가 공연을 많이 했는데, 성가는 음역이 낮아 콜로라투라(가장 높은 음을 내는 소프라노)의 기능을 잃게 됐죠. '성가를 버리든지 오페라를 그만두라'는 교수님 말씀에 오페라를 포기했어요." 김씨는 1980년 아이오와 대학의 제의로 음대 교수가 됐지만, 1982년 결혼하고 4년 뒤 자녀 교육을 위해 교수를 그만뒀다. 그 뒤로는 두 아들을 키우며 교회 성가대나 동창 모임 등에서 가끔씩 노래를 부르며 음악을 그만둔 아쉬움을 달랬다.
김씨는 9일 공연을 앞두고 귀국했지만, 지난주 병원에서 당뇨로 각막에 출혈이 심해 수술을 받았다. 공연 당일 아침에도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김씨는 "합창단은 저를 새로운 세상에 보내준 친정이라 소리를 낼 수 있는 한 반드시 무대에 설 것"이라며 "그래야 좀 더 성공한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 미안함을 떨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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