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미, '그때 일'을 말하다 - "살아보니 대단한 남자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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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0-09-11 16:52 조회5,580회 댓글0건본문
김지미, '그때 일'을 말하다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어디다가 나를 갖다 붙이나
김지미. 60년대 최고 흥행 배우이자, '미인'의 대명사이다. 가십을 좋아한다면, 그 이름은 감독(홍성기), 배우(최무룡), 가수(나훈아), 의사(이종구)와 살다 헤어진 여자의 이름이다. 그 이름은 또 '치마 두른 남자'로 통하는 통 큰 제작자의 이름이며, 동시에 영화운동가들에겐 '타도되어야 할 충무로 구세대'의 한 명의 이름이기도 했다.
영화계의 신구 갈등이 정점에 달한 2000년 6월, 당시 영화인협회 이사장이었던 김지미(70·본명 김명자)는 협회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다음날,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7세에 데뷔해 43년 몸담아온 영화계와는 그것으로 영영 작별이라 생각했다. 간간이 서울에 오긴 했지만, '그때' 일을 구구절절 말하지 않았다. 밀려드는 돈으로 영화 만들기에 바빴던 후배들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랬던 그가 지난 7일, 서울 남산의 한 레스토랑에서 기자와 만나 많은 말을 쏟아냈다.
여배우, 김지미
―여배우로서 50년을 살았다. 그거 어떤가. 후배나 딸에게 권할 만한가.
"권하지 않겠다. 예를 들어 나같이 그악스럽다거나 절대적으로 남에게 지지 않겠다는 성격을 가졌다거나 하지 않으면 힘들다. 난 꽉 차 있다. 자만심으로. 하지만 이건 나니까 가능하지, 너희가 젊을 적 나만큼 할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못해 먹겠다 하는 순간도 있었나.
"별걸 다 견뎌야 하고 별걸 다 극복해야 하는 게 배우다. 보통여자 같으면 온 국민이 그 여자 스캔들 알 일이 있나. 난 배우라서 다 까발려졌다. 배우라서 그런 거 견뎌야 하는데, 힘들게 살지 말라는 거다."
―여배우의 전성기란 매우 짧고, 노후도 불안하다. 여배우가 부자(富者)와 결혼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불안 때문이라는데.
"부자가 왜 필요한가. 배우에게 자기 몸뚱아리만큼 큰 재산이 없는데, 자존심 버리고 부잣집 가서 빌빌거리며 살 필요가 뭐가 있나. 전성기? 난 50년이다. 여배우는 자긍심을 갖고 자존심을 살려야 한다. 스테이크 먹을 거, 된장국 먹으며 살면 된다."
―영화배우로 컴백은 안 하나.
"관두면 관두는 거지 뭐 구질구질하게…. 꼭 한 번 더하고 죽어야겠다 싶은 영화가 있으면 모르겠지만, 이 나이에 너덜거리면서 영화계 얼쩡거릴 생각은 없다. 내가 천 리에 가 있어도 너희가 필요하면 나 모시고 가라, 이런 생각이다."
―미국 생활은 어떤가.
"남매 중 4명, 그리고 딸 둘(홍경임, 최영숙)과 손주들, 가족들에 둘러싸여 산다. 거의 평생 처음으로 가족이 이런 거다 느낀다. 그리고 세상이 나를 몰라주는 고마움. 내 것 갖고, 내가 살면서도 눈치 보는 일이 너무 많았다. 신경 안 쓰고 사니, 이게 아주 좋다."
1998~2000년 그 격동의 시대
제작자로서, 95년부터 영화인협회 이사장직을 맡아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98년부터 젊은 영화인들의 모임과 갈등을 빚으며 몇년 후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이후 광고를 촬영한다거나 주부 대상 강연을 가진 적은 있지만, 정치적 사건과 그 소회를 말한 적은 없다.
―서울엔 어떻게 왔나.
"2년 전, 부산국제영화제 김동호 집행위원장이 내가 사는 미국에 오셔서 회고전을 준비하겠다고 말씀해서 사양했다. 그럴 기분도 아니었고. 그런데 또 오셨더라. 너무 사양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 그러자고 했다. 들어와서 자료 정리하는 중이다." (7월 17일 입국한 그는 10월까지 서울에 머물며 부산 국제영화제(10월 7~15일)에서 마련한 '김지미 회고전'에 참석한다.)
―지난 2000년 전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 좀 해보자. 먼저 젊은 영화인과의 갈등부터. (55년 설립된 영화인협회 중심으로 움직여온 영화계는 98년부터 격동기를 맞는다. 이른바 진보 영화인인 문성근·유인택·명계남 등이 주축이 돼 98년 충무로포럼을 결성한다. 두 단체의 갈등이 폭발한 것은 이후 출범할 영화진흥위원회의 위원 추천권을 두고. 충무로포럼이 협의에 들어가자 협회는 인선 논의를 중단하라며 경고조치를 주었고, 명계남씨 등은 반발했다. 이 단체의 후신인 '영화인회의'가 출범하고 다수 영화인이 이 단체를 지지하면서 협회는 실질적으로 혼수상태에 돌입했다.)
"나는 사실 그때 명계남·문성근 이런 사람들 이름도 몰랐다. 얼굴 본 적도 없고. 그런데 영화인협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면 될 것을 나서서 데모만 하니까 영화계 물을 흐리는 거 아니냐 싶었다. 협회가 있는데 왜 다른 단체가 또 필요한가. 게다가 구세대는 다 물러가라니, 영화 역사를 지켜온 사람이 누군데, 왜 물러가야 하나. 선배가 잘못했다고 '너희 다 물러가라' 이런 식이면 공산당과 뭐가 다른가. 부모 잘못하면 업어다 고려장 시키나."
―앞서 대종상 공정성 시비, 영화업자 탈세 등 구세대 비리가 많이 드러났다. 개혁하자는 그들 주장 중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게 있었나.
"우리를 보고서 인사도 안 하는 애들이었다.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본 적도 없다. 우리가 주최하는 토론회 같은 데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분열은 언제 시작됐나.
"98년 김대중 대통령 들어서면서."
―이상하다. 정권 바뀌었다고 영화계 후배들이 갑자기 그렇게 될 수 있나.
"그게 갑자기 그렇게 되더라니까. 왜 갑자기 그들이 혁명군들처럼 그랬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정부에서 지원을 해줬는지 어땠는지."
―개성 강한 영화인들의 협회를 몇년씩 무리 없이 이끌었고, 1999년 영화진흥위원회 1기가 출범하면서 위원에 선임됐다. 그러나 신세길 위원장-문성근 부위원장 선출과정의 불법성을 지적하면서 갈등의 국면이 조성됐다.
"자기네 사람들 앉히고 싶어서였는지, 규정을 깨고 위원장-부위원장을 뽑았다. 내가 '이건 무효'라고 문화관광부에 서류를 내고 난리를 쳤다. 국회 문광위에서 이 문제를 추궁하니, 당시 박지원 문광부 장관이 내가 동의를 했다고 위증을 하더라. 내가 너무 화가나 내용증명을 보내서 '증거를 보이라'고 했다."
―젊은 세대의 영화 정책 중 특히 어떤 문제에서 부딪쳤나.
"성인 전용관 문제. 성인전용관을 합법화하는 것은 더러운 문화를 영화법에 넣어 보호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는 95년 영화인협회 이사장 자리에 오른 후 줄곧, 왜 국가가 순수하지 않은 문화를 보호하는가 하고 반발했다. 98년엔 그 시도가 좌절됐다. 하지만 2001년 12월 영화진흥법이 개정되며 성인영화 전용관을 법적 틀 안으로 갖고 들어온 것 아닌가. 이사장직에 있으면서 한 달에 개인 돈 1000만원 이상을 써가면서 했다. 그런데 역부족이겠다 싶더라. 김지미 하나 쓰러뜨리면 다 정리할 수 있다는 식으로 몰아붙이는데…. 내가 무슨 비리 저지른 거 있나? 있으면 대봐라."
―구세대가 물러남으로써 영화계 창의력이 높아졌다고들 하지 않는가.
"창의력? 그건 개인의 능력이다. 그걸 떼로 하나?"
―정말 그런 갈등뿐이었나. 뭔가 사건의 전말이 다 꿰어지지 않는 느낌이다.
"다 얘기 못 한다. 이건 정권 뒷얘기랑 관련이 있어서, 수십년 후에나 가능한 얘기다."
―당시 기사를 보면, 박지원 장관이 "업계 어른이 잘 보듬어달라"는 식으로 얘기했던데. 정권 차원에서 부탁이나 압력이 들어오지 않았나.
"내가 못하겠다고 했다."
―생전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빚진 영화인은 김지미가 유일하다고 말했다는데.
"70년 신민당 대선 후보전에서 YS와 DJ가 경쟁하던 무렵, DJ 기자회견장에 배우로서는 내가 유일하게 참석했다. 오빠가 신민당 대덕·연기 지구당 위원장이기도 했지만, 너무 썩고 냄새 나고 싫증이 나는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있던 때였다."
―그러면 김대중 정부 들어서면서 뭔가 혜택을 본 게 있겠다.
"문화계 대표로 뭘 해봐라, 이런 제안은 받았다. 그런데 내가 배우로서 김지미인데 어디 가서 왜 다른 일을 하나. 나는 국회의원으로 만족 안 한다. 김지미로서 만족한다. 그런 일에 관심 있는 사람 데려가라고 이름도 대줬다. 그랬더니 '하려고 하는 사람은 싫다'고 하더라."
―김대중 정권에서 출범한 영화진흥위원회가 그간 좌파 영화인 전유물이 됐다는 게 영화인협회의 주장이다.
"97년 대통령 유세 기간에, 김대중 후보가 부산에 들렀기에 만났다. 도와달라고 하더라. 그러면 영화계에 뭘 해주겠느냐 물었더니, 1000억원 지원하겠다더라. 영화 교수(정용탁)가 원금 쓰지 않고 몇십년 끌고 가려면 3000억원쯤 필요하다 하더라. 그게 너무 많아 보여서 '2800억원'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영진위 기금이 마련되게 된 거다. 난 직접 지원이 아니라 담보 넣고 연 3% 저리로 대출해주자고 했다. 그런데 그걸 반대하더라. 그들이 거기 장악하고 나서, 그걸 직접지원으로 돌렸다."
―그렇게 기반을 마련하고 나서 영화계에서 그 꼴을 당한 건가.
"그러니 내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겠나."
지미, 그 '사건'의 여인
어떤 이들에게 김지미는 남성을 파멸시키는 '팜므파탈'의 상징이었고, 어떤 이들에겐 관습을 훌훌 벗어던진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였다.
―1957년 덕성여고 재학 중, 명동에서 김기영 감독에게 '길거리 캐스팅'되어 곧바로 영화 '황혼 열차'의 주연으로 데뷔했다. 이듬해 '별아 내 가슴에'로 스타 반열에 오르고, 영화를 연출했던 홍성기(1928~2001) 감독과 결혼했다. 18세에 결혼이라…. 너무 이른 거 아니었나(김지미의 아버지는 서울서 인쇄기계공장 및 인쇄소를 운영했고, 8남매 중엔 서울대 문리대, 서울음대 등 명문고·명문대 출신이 많다).
"홍 감독이 나보다 12살 많은 늙은 총각이긴 했지만, 당시 유명한 감독이었다. 사실 영화를 찍는 건지, 사실인지도 모를 정도로 어수선하고 정신없이 몰아치는 와중에 결혼식을 치렀다."
―전성기 감독과 신인 여배우의 만남. 마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주연한 영화 '스타 탄생'이 생각난다. 영화에서 아내는 가수로 승승장구하지만, 스타 남편은 슬럼프에 빠져 파경을 맞는다.
"결혼 후, 국제극장에 속한 당대 최고 영화사에 최무룡(1928~1999)씨와 내가 전속배우가 됐다. 일주일에 한두 번 집에 들어갈까 말까 하는 상황이었다. 그 나이에 가정이나 남편이 중요하게 보였겠나.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 보니, 뭐가 문제인지도 모른 채 이혼이 되더라.
두 사람은 결혼 4년 만인, 1962년 9월 4일 이혼을 발표했다. 홍 감독은 "하룻벌이를 하는 지게꾼의 신세가 부럽다"고 했고, 김지미는 "어차피 맞을 소나기"라고 했다. 당시 편당 30만원의 출연료를 받던 김지미는 집 두 채(600만원) 값을 남편 영화제작비용으로 댔다. 두 사람이 이혼할 무렵, 영화배우 최무룡의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최무룡씨와는 어떻게 간통사건으로 얽히게 됐나.
"당시 최무룡씨와 거의 온종일 붙어 다니며 영화를 찍었다. 현장에 앉아 서로 자기 속상한 얘기 같은 거 털어놓게 되지 않나. 그러다 정이 들었는데, 이게 '빵'하고 터져버리더라. 수습해야 하니까, 안 살 수가 없게 된 거다."
(62년 9월 말, 최씨의 부인인 영화배우 강효실씨는 "개복 수술로 아이(영화배우 최민수)를 낳은 지 열흘 만에 남편과 김지미의 간통 사실을 확인했다"고 폭로하고, 다음 달 두 사람을 간통죄로 고소했다. 두 배우는 구속됐고, 김지미씨는 자신의 집을 팔아 위자료 230만원, 채무변제 78만원 등 약 300만원을 강씨 측에 주기로 합의하고, 11월 7일 석방됐다.)
―위자료를 왜 최무룡이 아닌 김지미가 물어줬나.
"내 행동이 범법이라면 달게 감옥에 가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족들이 난리가 났다. 게다가 나를 캐스팅한 영화가 30편 정도에 달했던 때였다. 내가 안 나가면 영화계가 풍비박산 나게 생겼었다. 최무룡씨는 돈이 없었다."
―사건 당시, 복혜숙 영화배우협회장은 검찰 심문에서 '검찰수사와는 별개로 협회 측에서 두 사람의 영화출연을 정지할 방침'이라고 밝혔고, 실제로 협회가 1년 출연정지를 결정했다. 기분이 어땠나.
"처음 듣는 얘기다. 그때는 내가 영화 출연 안 하면 영화계가 안 돌아갔는데…. 난 아무 통보를 받은 적이 없다. 아마 사회분위기가 엄했으니까 그렇게 얘기했을 거다."
―간통사건에도 불구, 여전히 최고 배우였고, 70년에는 일일세관원으로 휴대품을 검사하는 등 '국책 이벤트'에도 동원됐다. 그 시대 어떻게 가능했나.
"사람들이 참 희한한 것 같다. 나를 욕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또 한 편에서는 '내가 못한 거 실컷 해서 통쾌하다' '당당하게 잘했다'는 얘기를 편지로, 전화로 전해왔다."
(두 사람의 7년 결혼 생활은 69년 6월 10일 끝났다. '사랑에 파탄이 가서가 아니라 지미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한다'는 최씨의 말이 화제가 됐다. 최씨는 영화제작으로 약 3000만원을 빚을 지고, 부도를 냈다. 김지미는 이후 76년부터 82년까지, 7살 연하의 가수 나훈아와 사실혼관계를 유지했다.)
―나훈아(63)씨한테도 돈이 많이 들었나.
"그렇지 않았다."
―나훈아씨와는 어떻게 만났나.
"나훈아가 노래를 잘해 우리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와서 노래를 몇번 해줬다. 형제지간처럼 지내다 군대 다녀오고 일이 없어 더 친해졌다. 오빠가 내 자금으로 신탄진에서 운영하는 공장에 자주 내려갔는데, 그 사람이 여러 번 따라왔다. 남녀관계니까 (육체적) 문제가 좀 있긴 있었지. 그러니 아니라고 할 수가 있나. 그래서 또 공개하게 됐다."
―유명인들은 발뺌 잘하지 않나.
"난 거짓말 안 하려고 한다. 뭔 사고가 난 게 사실인데 그걸 어떻게 아니라고 하나. 내가 이러니, 내 스캔들은 세상이 다 안다. 더는 뭣도 없다."
―2년 전, 나훈아씨가 세간의 흉한 소문을 불식시키려 기자 회견을 열고는 지퍼를 내리며 '바지를 내려 5분간 보여주겠다' 하며 흥분하는 걸 보니, 그 양반 성격도 매우 격하더라. 두 사람이 살면서도 굉장했겠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격해질 일이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 자기 얘길 하지 왜 남의 얘길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91년 결혼한 이종구(78) 박사랑은 좀 오래 사시지, 왜.
"나는 마누라가 필요하지 남편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 박사가 어머니 치료해준 의사다. 어머니가 의사 사위 얻으면 천년만년 사실 줄 알았는지, 둘이 합치라고 그렇게 그렇게 몸살을 내시더라. 외국 생활 많이 한 한국 남자는 한국식도, 미국식도 아니어서 맞추며 살기 어렵더라."
―남편들한테 사업자금도, 돈도 정말 많이 쏟아 부었다. 간통죄로 구속되며 험한 꼴도 당했다. 남자가 그렇게 소중한 존재인가.
"그런 생각은 안 들지. 솔직히 말해서 (그들이) 나보다 잘난 게 없었으니까. 나는 과감하고, 대담하고, 용기 있고, 옳다 믿으면 양보를 절대 안 하는 성격이다. 그런데 살아보니 그렇게 대단한 남자는 없더라. 나이 많은 사람과도, 어린 남자랑도 살아보니, 남자는 항상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더라."
김지미, 영화배우 그리고 제작자
―임권택 감독 영화 '하류인생'에 보면 건달들이 서로 여배우를 데려가겠다며 시비를 벌이자 여배우가 육두문자를 하면서 깡패들보다 더 난동 부리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모델이라던데.
"60년대에는 내가 동시에 32편의 영화를 찍은 적도 있다. 한 달 30일을 밤과 낮으로 60개로 나누고, 밤낮을 다시 반으로 나눠, 한 달 스케줄을 120조각으로 만들었다. 하루에 4개 현장에서 촬영하는 거지. 60년대 한국 영화전성기가 펼쳐지면서 영화제작편수가 갑자기 늘어났는데, 배우는 적었다. 배우를 잡아오려고 깡패출신인 영화사 제작부장들이 현장에서 주먹다짐하는 일이 많았다. 힘 약하면 매 맞고 배우도 못 데려간다. 나는 주먹 센 사람들 안 따라갔다. 맞은 사람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20대부터 기질, 성격이 그랬다."
―한복보다 양장이 더 잘 어울린다고, 요염하다고, 또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이렇게 불렸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얘기다. 김지미는 김지미인데,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는 건 너무 저질스러운 얘기 아닌가."
―대략 700편으로 추정되는 영화에 출연했다. 황진이, 장희빈 등 전통적인 미녀부터, 순애보 여성, 비구니, 바람난 주부 등 캐릭터의 진폭이 매우 큰 배우였다. 어떤 영화가 기억에 남나.
"차라리 한강 자갈밭에서 자갈을 고르라고 해라. 못 고른다. 젊어서는 내 연기가 하도 부끄러워서 안 본 영화도 많다. 그런데 며칠 전, 임권택 감독과 '티켓'을 다시 봤는데, 내 연기가 좋더라고. 제작자로서 볼 때는 안 좋은 게 많이 보이더니 이제 관객 눈이 되니 좋더라. 임 감독께서도 '내가 이렇게 영화 잘 만든 줄 몰랐네요' , '김 여사가 이렇게 연기 잘하는 거 몰랐어요' 하시더라."
―여배우 중 성공한 제작자가 된 건 김지미가 처음이다. '티켓'을 비롯하여, '아메리카', '불의 나라', '추억의 이름으로', '아낌없이 주련다'등 감각적이면서도 시대상이 반드시 녹아있는 영화였다.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게 연기인 줄 알았다. 최무룡씨와 사이에 낳은 아들도 돌 무렵 병으로 잃어(사망)버렸는데, 그때도 난 영화 찍으러 다니느라 슬프고 어쩌고 할 틈이 없었다. 시간이 좀 지나 70년 중반쯤 되니까, 이렇게 겹치기 하면 내가 배우가 아니라 기능공 아닌가, 한국 영화는 왜 이렇게 만날 울고 짜기만 하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 출연을 좀 줄였다. 그러다 80년대가 되니 출연작도 확 줄어들어 내가 뭐로 영화계에서 살아갈까 생각하다가 영화사를 차렸다."
―지미 필름 창립작 '티켓'(86년)이 크게 성공하면서 임권택 감독의 흥행파워가 또다시 주목받게 된다.
"여배우들과 왕래는 없었지만, 현장 스태프와는 친했다. 우리 사무실에 와서들 놀았는데, 내가 영화를 한번 해보자고 했다. 임 감독, 송길한 작가, 구중모 촬영기사, 나 이렇게 무작정 강원도로 달려갔다. 여관으로 커피를 시켰더니, 다방 종업원이 '빨리 마셔라. 안 그러면 티켓을 끊으라'고 하더라. 이걸 파고들어가 나온 게 그 영화다."
―91년에는 대작 '명자 아끼꼬 쏘냐'(감독 이장호)를 제작했다. 일제시대, 소련으로 끌려간 여인의 이야기를 위해 러시아에서 촬영, 무려 제작비가 18억원이 들었다. 그러나 평단은 냉담했고, 관객 동원도 저조했다. 판단 실수였나.
"우리나라가 미약하고 힘없었을 때, 돈 몇푼 벌려고 끌려가서 죽거나, 못 돌아오는 사람들 얘기 아닌가. 해야 했다. 이 영화가 사할린 교포 영주귀국의 계기가 된 것만으로도 난 뿌듯하다. 영화는 실패했지만, 기획은 후회하지 않는다. 어차피 난 내 돈으로 영화 다 찍었다. 한 번도 남의 돈 안 썼다. 지금 남의 돈(투자자)으로 영화 만든다고 몇백억씩, 신인들에게 안겨주는 거, 절대 잘하는 일이 아니다. 돈(자본)에 대한 결벽성(潔癖性)이 있어야 한다."
―영화계와의 인연, 50년이 넘는다. 정말 아직도 안 풀리는 화 같은 게 있나.
"영진위 사건은 영원히 못 잊는다. 용서가 안 된다. 불의였으니까.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그런 식으로 하진 않는다. 구세대 다 물러가라 이런 식이었으니, 그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배우들과 만나고 있으면 마치 기자 앞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다 말하는 것 같은데도 말이다. 김지미는 꼿꼿하고, 도도했다. 뭔가 말하지 않는 게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이 사람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둘 중 하나다. 매우 솔직하거나 연기력이 신의 경지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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