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신창이로 다시 한국 찾은 전 주한미군 ‘고엽제’ 폭로
페이지 정보
관리자 작성일11-07-25 13:04 조회5,151회 댓글0건본문
고엽제 피해자 증언을 위해 방한한 스티븐 하우스 씨. (뉴스한국)
스티븐 하우스 “캠프 캐롤 가면 고엽제 묻은 위치 지목할 수 있다”
필립 스튜어드, “고엽제 유해성 알았다면 살포 명령 어기고 부하에게도 명령 안 했을 것”
주한미군 기지 안팎에서 미군 병사들이 다이옥신 등 발암물질을 다량 함유한 맹독성 제초제를 살포하거나 매립했다는 증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전 주한미군 두 사람이 방한했다.
한국사회에서 유령처럼 남아있는 고엽제 행방에 단초를 제공한 인물은 스티븐 하우스(55) 씨와 필립 스튜어드(63) 씨다.
하우스 씨는 1978년 2월부터 1979년 2월까지 캠프 캐롤(경북 칠곡 왜관 위치)에서 근무하며 다른 병사들과 함께 고엽제가 담긴 드럼통을 참호에 매립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 스튜어드 씨는 1968년 캠프 피터슨에서 캠프 이선알렌으로 발령받은 후 상부의 지시에 따라 고엽제를 살포하고, 부하들에게 살포를 지시했다고 토로했다.
지난 24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두 사람은 25일 국회 증언대회에 참석해 30~40년 전의 참담한 실상을 밝혔다.
#1. 스티븐 하우스 씨의 증언 "녹슨 드럼통에서는 용액이 줄줄 새고 있었다“
하우스 씨는 1975년 12월부터 1979년 12월까지 미 육군에, 경북 왜관에 위치한 캠프 캐롤에서는 1978년 2월부터 1979년 2월까지 근무했다.
하우스 씨가 고엽제와 마주했던 것은 1978년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 그는 상부로부터 D(델타)구역에서 참호를 측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D구역은 캠프 캐롤 내 헬기장 뒤에 있는 축구장 규모의 평지다. 참호는 약 7.7m~9m 길이에 깊이는 6m~9m 크기였다. 땅은 진흙이 아니라 모래였다고 한다.
하우스 씨는 참호를 완성한 후 부대의 덤프트럭이 올리브색과 녹색의 드럼통(208ℓ 규모)을 운반했다. 이 때 하우스 씨의 동료 병사가 드럼통에서 ‘화학물질 형태: 오렌지’ ‘1967년’ ‘베트남’이라는 글씨를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드럼통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높은 습도와 온도로 몇몇이 쓰러지거나 아팠고, 이때 상부에서는 방독면을 벗어도 된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운반 과정에서 많은 드럼통이 깨졌고 용액이 새어나와 병사들의 몸에 묻기도 했다는 것이 하우스 씨의 설명이다.
기지 내 모든 드럼통을 참호에 매립한 뒤 한국 내 다른 부대에서 고엽제 등을 담은 드럼통을 실어 왔고, 하우스 씨는 이것을 참호로 인도했다. 하우스 씨는 “1978년 가을까지 거의 6개월간 일주일에 2~3회에 걸쳐 D구역에서 드럼통을 매립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하우스 씨가 판 참호 중 4분의 3이 늦가을경에 가득 찼다. 그는 참호를 메운 드럼통이 500~600개에 달한다고 덧붙였다. 이후 1979년 초 이곳을 방문했을 때 참호는 눈과 물로 덮여있었고 물에는 노란색과 갈색 거품이 떠 있었다고 한다. 또 참호 주변의 산등성이 아래 풀이 모두 죽은데다 토끼와 새를 비롯한 동물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우스 씨는 명예 제대할 때 자신의 의료기록을 열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제대 후 미국에 돌아와 캠프 캐롤의 의료기록을 찾아봤지만 당시 치료 기록은 모두 사라졌다며 답답해했다. 당뇨병과 말초신경장애, 녹내장, 피부발진, 심리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 온갖 병을 앓고 있다는 그씨는 “당뇨 치료를 위해 하루 종일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토로했다.
하우스 씨는 지난 2006년 미국 국가보훈처에 장애수당을 수당을 신청했지만 지난 2008년 10월 거부 통보를 받았다. 미 보훈처는 1968년부터 1974년까지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한 미군 병사들만이 고엽제에 노출되었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한국을 찾은 이유에 대해 “캠프 캐롤의 고엽제 매립에 대한 진실규명의 신속한 조사를 돕기 위해서다”라고 밝혔다. 이어 “제가 드럼통을 묻었던 지역과 지점을 방문할 준비돼 있다”며 “미군 당국이 1978~1980년 기간에 D구역에 묻은 드럼통을 재반출해 캠프 밖으로 옮겼다고 주장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여기에 관련한 군 문서는 어디에 있나”라고 되물었다.
하우스 씨는 자신과 함께 중장비 기사로 일했던 다른 동료병사들도 증언할 준비를 했다고 덧붙였다.
#2. 필립 스튜어드 씨의 증언 "부하 중 3명은 고엽제 관련 질환으로 사망했다“
스튜어드 씨는 1968년 10월 한국에 와 1969년까지 복무했다. 캠프 피터슨(파주시 광탄면)에서 복무하던 중 부대 수송부에 고엽제가 든 208ℓ 용량의 드럼통 200~300개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 고엽제의 존재를 알았다. 그는 본부 중대 소속 병사들이 캠프 피터슨 주변 지역에 고엽제를 살포하는 것도 목격했고, 고엽제를 담은 드럼통들이 캠프 피터슨 밖으로 나가는 것도 수차례 지켜봤다고 설명했다.
그는 1969년 4월 캠프 이선알렌으로 발령받은 후 고엽제를 자주 접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곳에서 부하들에게 정기적으로 고엽제를 살포하도록 지시했고 도로변 배수로에서도 정기적으로 고엽제를 살포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배수로의 물이 개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게다가 더욱 끔찍한 것은 고엽제 살포작업 당시 상부로부터 “매우 안전하며 이를 닦거나 목욕을 해도 해가 없을 것”이라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병사들은 고엽제를 분사한 후 마을 빨래터에서 장비를 세척했고, 민간인 도우미들은 장병들의 군복을 부대내 세면장에서 세탁했다.
1967년경 미 육군 화학사령부가 고엽제의 독성이 바람을 타고 최대 200마일 밖으로 퍼질 수 있고 소각하지 말라고 경고한 시점에, 한국에서 주한미군은 빈 고엽제 드럼통에 디젤을 채워 가동했다. 이 때 발생한 연기가 캠프와 마을까지 퍼져나간 일이 잦았다. 당시 현지 지휘관에게 상부에서는 고엽제에 대한 어떤 안전 경고나 지령도 하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2005년경부터 자신의 질환들이 한국 복무 당시 고엽제 노출 때문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그는 장애인 반청을 받았고 현재 허혈성 심장질환과 관상동맥 질환, 당뇨병, 말초동맥질환, 백내장, 피부암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스튜어드 씨는 1960년에서 1970년 사이에 한국에서 복무한 퇴역 주한미군을 수소문했고, 현재 300명 이상과 연락을 취하고 있다. 이들을 통해 수소문한 결과 자신의 중대 부하 중 3명이 고엽제로 인해 사망한 사실과 다른 퇴역군인 2명 역시 고엽제 다이옥신 중독으로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최근 입수한 미 보훈처 문서에서 2008년 7월 23일 미 육군 산하 부대기록 연구센터의 서신을 발견했다. 이 서신에는 1962년부터 1970년까지 DMZ부터 주한 미1군단 사령부와 한국군 제 1야전군 지역까지 고엽제를 사용했고 이 기간 동안 수동펌프와 분사장비를 장착한 트레일러를 이용한 사실이 나타나 있다고 스튜어드 씨는 설명했다.
스튜어드 씨는 "미국이 언제 어디에서 고엽제를 한국에 들여와 이동시켰는지에 대한 모든 문서를 감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진실이 드러날 경우 보상과 정화에 천문학적 규모의 비용이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증언이 한미관계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기 바란다"면서도 "한국전쟁 이후 어떤 제초제가 얼마큼 한국에 들어왔고 어떤 방식을 통해 어디에서 처리했는지에 대한 세부 문서를 공개하라"고 촉구했다.
하우스 씨와 스튜어드 씨의 설명은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수십 년 전의 일을 곱씹으며 울먹이다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과거 한국 땅에서 벌어진 참상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증언대회에 참석해 고엽제 진상조사 브리핑을 한 노동환경건강연구소 김신범 실장은 “우리 사회의 고엽제 문제를 추적하는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베트남전에 사용한 고엽제가 미군 병사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문제제기후 미국은 1977년부터 2004년까지 ‘페이서 호’라는 이름의 작전을 통해 존스턴섬 근처에서 소각 폐기했다. 하지만 한국으로 들어온 고엽제의 행방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김 실장은 "얼마나 많은 고엽제가 어느 곳을 통해 들어왔고, 어느 곳에 살포했으며 남은 양이 얼마인지 이것을 어디에 매립하고 어디로 이동시켰는지 모든 것이 의문"이라고 말했다.
하우스 씨는 스튜어드 씨와 함께 오는 27일 캠프 캐럴을 방문해 자신이 고엽제를 묻은 지점을 지목할 예정이다. 하지만 미군이 순순히 문을 열어 줄지는 의문이다.
이에 대해 박석운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는 “하우스 씨가 고엽제를 묻은 장소를 가리키는 순간 굴착기를 동원해 진실을 확인해야 할 것"이라며 "하지만 하우스 씨를 저지한다면 미군은 고엽제를 매립했다는 주장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스티븐 하우스 “캠프 캐롤 가면 고엽제 묻은 위치 지목할 수 있다”
필립 스튜어드, “고엽제 유해성 알았다면 살포 명령 어기고 부하에게도 명령 안 했을 것”
주한미군 기지 안팎에서 미군 병사들이 다이옥신 등 발암물질을 다량 함유한 맹독성 제초제를 살포하거나 매립했다는 증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전 주한미군 두 사람이 방한했다.
한국사회에서 유령처럼 남아있는 고엽제 행방에 단초를 제공한 인물은 스티븐 하우스(55) 씨와 필립 스튜어드(63) 씨다.
하우스 씨는 1978년 2월부터 1979년 2월까지 캠프 캐롤(경북 칠곡 왜관 위치)에서 근무하며 다른 병사들과 함께 고엽제가 담긴 드럼통을 참호에 매립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 스튜어드 씨는 1968년 캠프 피터슨에서 캠프 이선알렌으로 발령받은 후 상부의 지시에 따라 고엽제를 살포하고, 부하들에게 살포를 지시했다고 토로했다.
지난 24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두 사람은 25일 국회 증언대회에 참석해 30~40년 전의 참담한 실상을 밝혔다.
#1. 스티븐 하우스 씨의 증언 "녹슨 드럼통에서는 용액이 줄줄 새고 있었다“
하우스 씨는 1975년 12월부터 1979년 12월까지 미 육군에, 경북 왜관에 위치한 캠프 캐롤에서는 1978년 2월부터 1979년 2월까지 근무했다.
하우스 씨가 고엽제와 마주했던 것은 1978년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 그는 상부로부터 D(델타)구역에서 참호를 측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D구역은 캠프 캐롤 내 헬기장 뒤에 있는 축구장 규모의 평지다. 참호는 약 7.7m~9m 길이에 깊이는 6m~9m 크기였다. 땅은 진흙이 아니라 모래였다고 한다.
하우스 씨는 참호를 완성한 후 부대의 덤프트럭이 올리브색과 녹색의 드럼통(208ℓ 규모)을 운반했다. 이 때 하우스 씨의 동료 병사가 드럼통에서 ‘화학물질 형태: 오렌지’ ‘1967년’ ‘베트남’이라는 글씨를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드럼통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높은 습도와 온도로 몇몇이 쓰러지거나 아팠고, 이때 상부에서는 방독면을 벗어도 된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운반 과정에서 많은 드럼통이 깨졌고 용액이 새어나와 병사들의 몸에 묻기도 했다는 것이 하우스 씨의 설명이다.
기지 내 모든 드럼통을 참호에 매립한 뒤 한국 내 다른 부대에서 고엽제 등을 담은 드럼통을 실어 왔고, 하우스 씨는 이것을 참호로 인도했다. 하우스 씨는 “1978년 가을까지 거의 6개월간 일주일에 2~3회에 걸쳐 D구역에서 드럼통을 매립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하우스 씨가 판 참호 중 4분의 3이 늦가을경에 가득 찼다. 그는 참호를 메운 드럼통이 500~600개에 달한다고 덧붙였다. 이후 1979년 초 이곳을 방문했을 때 참호는 눈과 물로 덮여있었고 물에는 노란색과 갈색 거품이 떠 있었다고 한다. 또 참호 주변의 산등성이 아래 풀이 모두 죽은데다 토끼와 새를 비롯한 동물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우스 씨는 명예 제대할 때 자신의 의료기록을 열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제대 후 미국에 돌아와 캠프 캐롤의 의료기록을 찾아봤지만 당시 치료 기록은 모두 사라졌다며 답답해했다. 당뇨병과 말초신경장애, 녹내장, 피부발진, 심리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 온갖 병을 앓고 있다는 그씨는 “당뇨 치료를 위해 하루 종일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토로했다.
하우스 씨는 지난 2006년 미국 국가보훈처에 장애수당을 수당을 신청했지만 지난 2008년 10월 거부 통보를 받았다. 미 보훈처는 1968년부터 1974년까지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한 미군 병사들만이 고엽제에 노출되었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한국을 찾은 이유에 대해 “캠프 캐롤의 고엽제 매립에 대한 진실규명의 신속한 조사를 돕기 위해서다”라고 밝혔다. 이어 “제가 드럼통을 묻었던 지역과 지점을 방문할 준비돼 있다”며 “미군 당국이 1978~1980년 기간에 D구역에 묻은 드럼통을 재반출해 캠프 밖으로 옮겼다고 주장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여기에 관련한 군 문서는 어디에 있나”라고 되물었다.
하우스 씨는 자신과 함께 중장비 기사로 일했던 다른 동료병사들도 증언할 준비를 했다고 덧붙였다.
#2. 필립 스튜어드 씨의 증언 "부하 중 3명은 고엽제 관련 질환으로 사망했다“
스튜어드 씨는 1968년 10월 한국에 와 1969년까지 복무했다. 캠프 피터슨(파주시 광탄면)에서 복무하던 중 부대 수송부에 고엽제가 든 208ℓ 용량의 드럼통 200~300개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 고엽제의 존재를 알았다. 그는 본부 중대 소속 병사들이 캠프 피터슨 주변 지역에 고엽제를 살포하는 것도 목격했고, 고엽제를 담은 드럼통들이 캠프 피터슨 밖으로 나가는 것도 수차례 지켜봤다고 설명했다.
그는 1969년 4월 캠프 이선알렌으로 발령받은 후 고엽제를 자주 접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곳에서 부하들에게 정기적으로 고엽제를 살포하도록 지시했고 도로변 배수로에서도 정기적으로 고엽제를 살포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배수로의 물이 개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게다가 더욱 끔찍한 것은 고엽제 살포작업 당시 상부로부터 “매우 안전하며 이를 닦거나 목욕을 해도 해가 없을 것”이라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병사들은 고엽제를 분사한 후 마을 빨래터에서 장비를 세척했고, 민간인 도우미들은 장병들의 군복을 부대내 세면장에서 세탁했다.
1967년경 미 육군 화학사령부가 고엽제의 독성이 바람을 타고 최대 200마일 밖으로 퍼질 수 있고 소각하지 말라고 경고한 시점에, 한국에서 주한미군은 빈 고엽제 드럼통에 디젤을 채워 가동했다. 이 때 발생한 연기가 캠프와 마을까지 퍼져나간 일이 잦았다. 당시 현지 지휘관에게 상부에서는 고엽제에 대한 어떤 안전 경고나 지령도 하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2005년경부터 자신의 질환들이 한국 복무 당시 고엽제 노출 때문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그는 장애인 반청을 받았고 현재 허혈성 심장질환과 관상동맥 질환, 당뇨병, 말초동맥질환, 백내장, 피부암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스튜어드 씨는 1960년에서 1970년 사이에 한국에서 복무한 퇴역 주한미군을 수소문했고, 현재 300명 이상과 연락을 취하고 있다. 이들을 통해 수소문한 결과 자신의 중대 부하 중 3명이 고엽제로 인해 사망한 사실과 다른 퇴역군인 2명 역시 고엽제 다이옥신 중독으로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최근 입수한 미 보훈처 문서에서 2008년 7월 23일 미 육군 산하 부대기록 연구센터의 서신을 발견했다. 이 서신에는 1962년부터 1970년까지 DMZ부터 주한 미1군단 사령부와 한국군 제 1야전군 지역까지 고엽제를 사용했고 이 기간 동안 수동펌프와 분사장비를 장착한 트레일러를 이용한 사실이 나타나 있다고 스튜어드 씨는 설명했다.
스튜어드 씨는 "미국이 언제 어디에서 고엽제를 한국에 들여와 이동시켰는지에 대한 모든 문서를 감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진실이 드러날 경우 보상과 정화에 천문학적 규모의 비용이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증언이 한미관계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기 바란다"면서도 "한국전쟁 이후 어떤 제초제가 얼마큼 한국에 들어왔고 어떤 방식을 통해 어디에서 처리했는지에 대한 세부 문서를 공개하라"고 촉구했다.
- 고엽제 피해자 증언을 위해 방한한 스티븐 하우스 씨는 증언대회가 끝날 무렵 "피해자들을 위해 모든 일을 다 했다. 저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고엽제 피해)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이것의 해답을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다 눈물을 쏟았다. (뉴스한국)
하우스 씨와 스튜어드 씨의 설명은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수십 년 전의 일을 곱씹으며 울먹이다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과거 한국 땅에서 벌어진 참상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증언대회에 참석해 고엽제 진상조사 브리핑을 한 노동환경건강연구소 김신범 실장은 “우리 사회의 고엽제 문제를 추적하는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베트남전에 사용한 고엽제가 미군 병사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문제제기후 미국은 1977년부터 2004년까지 ‘페이서 호’라는 이름의 작전을 통해 존스턴섬 근처에서 소각 폐기했다. 하지만 한국으로 들어온 고엽제의 행방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김 실장은 "얼마나 많은 고엽제가 어느 곳을 통해 들어왔고, 어느 곳에 살포했으며 남은 양이 얼마인지 이것을 어디에 매립하고 어디로 이동시켰는지 모든 것이 의문"이라고 말했다.
하우스 씨는 스튜어드 씨와 함께 오는 27일 캠프 캐럴을 방문해 자신이 고엽제를 묻은 지점을 지목할 예정이다. 하지만 미군이 순순히 문을 열어 줄지는 의문이다.
이에 대해 박석운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는 “하우스 씨가 고엽제를 묻은 장소를 가리키는 순간 굴착기를 동원해 진실을 확인해야 할 것"이라며 "하지만 하우스 씨를 저지한다면 미군은 고엽제를 매립했다는 주장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