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는 대로 팔다가… 이민간 흙수저의 대박 성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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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16-04-02 14:10 조회5,20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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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서 맨손으로 발전소 사업 일으킨 최상민 ESD대표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
식당일 하느라 학교도 못가… 미국 유학 갔다 돈 없어 포기
자잘한 사업하다 발전기 발견
'아 이건 남자가 해볼만하다' 현대중공업 설득해 판매 맡아
고장 나면 언제든 직접 달려가
현장 있다보니 어느새 공부… 업체서 절대적 신임 얻어
정전으로 난리났던 아이티
바로 복구하자 대통령 감동… 지진 때도 발 빠르게 대응
쿠바 동쪽에 우리나라 3분의 2 크기의 히스파니올라 섬이 있다. 카리브 해에 있는 이 섬 서쪽은 아이티 공화국, 동쪽은 도미니카 공화국이다. 이 섬에서 연간 4000만달러(약 460억원) 매출을 올리는 한국인이 있다. 도미니카에서는 전신주 1만5000개를 세웠고 아이티에선 발전소를 운영하며 아이티 전력의 50%를 공급하는 회사 ESD(Enterprise Specialized in Development) 최상민(40) 대표다. 지난달 10일 도미니카 수도 산토도밍고에서 아이티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최 대표를 만났다. 최 대표의 여권 표지에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도미니카 공화국'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민을 온 건가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도미니카로 이민을 결정하셨어요. 그때는 도미니카에 우리나라 봉제 공장들이 많았어요. 미국에서 면세 혜택을 줬거든요. 한국인만 800명이 넘었었죠. 아버지도 그런 공장에서 일하셨어요. 그러다 한국에 들어오셨는데 재취업이 잘 안 됐던 것 같아요. 그때 집이 아주 가난했었어요. 요즘 말로 '흙수저'였죠. 실직 상태인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가장 노릇을 하셨어요. 미싱을 돌려 한 달 45만원을 벌어서 부모님과 저, 남동생 네 식구가 반지하 월세 방에서 먹고 살았죠. 어느 날 아버지가 도미니카로 이민 가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식당을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
최 대표 가족은 1993년 5월 도미니카로 이민했다. 아버지 계획대로 수도인 산토도밍고에서 한식당을 시작했다. 식당은 꽤 잘됐지만 최 대표는 식당 때문에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회식하는 손님이 많아 최 대표와 동생이 밤늦도록 손님치레를 했기 때문이다. 새벽까지 일하느라 아침에 학교 갈 수가 없었다. 3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뒀다. 그러다가 한 손님이 "학생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 잘 생각하라"고 조언하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어렵게 비자를 받고 뉴욕에 있는 아버지 친구 집에 얹혀살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등록금이 가장 싼 뉴욕시립대(CUNY)의 버룩 컬리지(Baruch College) 회계 전공으로 입학했다. 외국인에게 영주권이 바로 나오는 직업 중 하나가 회계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 대표는 학교를 중간에 그만뒀다.
안 팔아본 게 없다
―졸업을 왜 하지 않았습니까.
"공부만 하기에는 생활이 너무 힘들었어요. 어머니가 보내주시는 돈이 넉넉하지 않아서 아르바이트하면서 살아야 했거든요. 한 달에 1000달러씩 보내주셨는데 월세 500달러 내고 통학용 지하철 요금으로 한 달 450달러를 썼어요. 밥을 먹을 돈이 없었죠.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했어요. 옷 가게에서 박스 나르고 식당에서 설거지하고, 하루 80달러 받고 공사장 일도 했어요. 게다가 제 등록금 때문에 부모님이 빚을 얻어서 항상 죄를 짓는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졸업하고 취업하면 좀 낫지 않았을까요?
"선배들을 봐도 답이 안 보이더라고요. 다들 졸업 직후엔 대형 회계법인에 들어갔지만 5년쯤 뒤엔 다른 데서 일하더군요. 회계에 소질도 없었어요. 결국 영업을 해야 하는데 영어도 잘 못하는 유색인종에게 누가 일을 맡겨주겠어요. 그쪽으로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니 결정하기가 쉬웠어요. 자퇴서를 내고 도미니카로 돌아와 버렸죠."
먹고살 길을 찾아야 했다. 2000년 도미니카로 돌아온 최 대표는 인조목 벤치(나무 무늬의 시멘트 의자) 사업을 시작했다. 최 대표는 인조목 벤치 샘플을 만들어 도미니카 전국의 골프장으로 영업을 다녔다. 샘플 벤치를 주고 오면 10개, 20개씩 주문이 들어왔다. 인조목 사업으로 10만달러(약 1억1500만원)를 벌었다.
―그 사업은 왜 그만뒀습니까.
"그게 끝이었어요. 인조목 벤치가 너무 튼튼해서 망가지지 않으니까 더 이상 팔리지 않는 거예요. 어느 날 일 끝나고 머리를 감는데 손가락이 머리카락에 들어가질 않았어요. 시멘트 때문이었죠. '시멘트 먹고 살다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고는 다른 걸 팔기 시작했어요. 도어록뿐 아니라 도로표지판, 야광봉, PVC 창틀, 비디오 초인종, 카드결제 단말기도 팔았어요. 30가지 넘는 상품을 팔았습니다. 한국에서 손님이 올 때마다 소개를 받아 그분들 사업 아이템을 도미니카에다 판 거죠. 안 팔아본 게 없다고나 할까요. 연결이나 소개시켜 주고 중간에서 이익은 조금 남기고요. 근근이 먹고살긴 했는데 다 일회성으로 끝났어요. 그러고는 아내를 한국에서 데리고 와서 결혼했는데, 그 뒤로 잘 풀리기 시작했어요."
"제가 책임질게요"
인조목 사업으로 번 돈은 모두 부모님 빚을 갚는 데 썼다. 2001년 아내와 결혼했지만 분가할 돈이 없었다. 식당 안쪽 단칸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결혼한 지 일주일 만에 도미니카로 출장 온 현대중공업 직원을 만났다. 그는 현대중공업에서 만든 발전기를 보자마자 대뜸 이걸 가져다 도미니카에 팔겠다고 했다.
―대기업을 어떻게 설득하셨나요?
"그동안 작은 것들만 팔다가 발전기를 보니까 '이건 남자가 한번 해볼 만한 사업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덩치도 있고 복잡하고 느낌이 좋았죠. 그런데 제 나이가 어리니까 현대 쪽에서 좀 망설이더라고요. 그래서 "현대중공업에서 손해 볼 것 없지 않으냐"고 큰소리를 쳤어요. 도미니카에서 일할 사람도 어차피 저밖에 없다고 패기를 부렸죠. 그런 저를 본 영업팀 부장이 한번 해보라고 했습니다. 4월에 큰소리를 쳤고 그 해 12월에 도미니카에서 제일 큰 발전소 회사에 발전기를 팔았어요. 10억원짜리 두 대니까 20억원에 팔았죠. 발전소 회사 부사장이 한국 음식을 좋아했거든요. 일주일에 한 번은 우리 식당에 데려가서 불고기를 먹였어요. 8개월 동안 엄청나게 공을 들인 거죠. 그렇게 들여온 게 '힘센 엔진' 1호예요."
―도미니카 발전회사는 어떻게 설득했나요?
"발전회사 사장이 절 부르더니 "이 엔진 진짜 돌아가는 것 맞느냐. 이런 엔진을 본 적이 없다. 못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내가 책임진다"고 했어요. 픽 웃더라고요. 미국, 핀란드, 독일 발전기와 비교했을 때 현대 제품이 많이 싸기도 했죠. 그런데 이게 '힘센 엔진'이 아니라 '힘든 엔진'이었어요. 고장이 너무 잦아서 고생을 너무 많이 시키더라고요. 책임지겠다고 했더니 문제가 생길 때마다 사장이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그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최 대표는 산토도밍고에서 자동차로 7시간 거리에 있는 발전소로 출동했다. 도미니카 발전소 직원과 현대 엔지니어가 서로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 대표가 직접 현장에 가서 어떤 현상이 나타났다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사진을 찍어서 한국으로 보내면 현대중공업에서 확인하고 전화로 설명하는 식이었다. 번번이 마다치 않고 현장에 출동하니 발전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공부를 하게 됐고 도미니카 발전회사에서는 최 대표를 신임하기 시작했다. 도미니카에서 돌아가는 한국산 발전기 개수도 늘어났다. 최 대표가 도미니카에 판매한 발전기가 30대가 되면서 발전기 소모 부품을 교체해주는 서비스 업체가 필요해졌다. 도미니카 업체들은 입을 모아 "최상민 아니면 서비스 안 받겠다"고 했다. 최 대표는 직원 8명을 데리고 ESD를 시작했다.
―사업은 잘됐나요?
"매출이 급격히 올랐어요. 2006년 150만달러, 그다음 해에는 350만달러가 됐고요. 2009년에 아이티 케페이션이라는 도시에 있는 발전소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전기가 갑자기 끊겨서 정전된 지역 사람들이 시위도 하고 난리가 났더라고요. 보다 못한 아이티 대통령이 현대중공업 직원들을 불렀어요. 발전소와 관계된 베네수엘라와 쿠바 관계자들도 들어왔고요. 저는 한국어 통역으로 그 자리에 갔어요. 아이티 대통령이 발전소가 빨리 정상 작동하지 않으면 사태가 더 심각해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도 베네수엘라, 쿠바, 아이티가 서로 책임을 미루고 있었죠. 하도 답답해서 제가 "저한테 열흘만 달라"고 했어요. 아이티 대통령이 그러겠노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현대중공업 직원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제가 무슨 수로 그걸 고치느냐는 것이었죠. 그런데 제가 그 발전소를 9일 만에 정상 작동시켰어요. 그때 아이티 대통령으로부터 큰 신임을 받았습니다. 때마침 아이티는 새로운 발전소를 세우려고 했어요. 물 팔다 보면 음료수 팔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더라고요. 그때부터 아이티에서 발전소를 짓기 시작했죠."
―2010년 지진 때는 별일이 없었나요.
"먼저 직원들을 현장에서 다 철수시키고 저는 아이티로 들어갔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짓고 있던 발전소나 운영하던 발전소에는 다행히 큰 피해가 없었어요. 가자마자 아이티 전력청장을 찾았어요. 전력 복구 계획을 당장 짜야 한다고 설득했죠. 대형 재난이 생기면 병원 같은 곳에 전기가 꼭 필요하거든요. 발전·송전·배전 이렇게 나눠서 계획을 짜놓으니 3일쯤 뒤에 미국과 프랑스가 재난 구호하러 들어왔습니다. 전력청장이 그들에게 저와 같이 짠 복구 계획을 내밀었어요. 열흘 만에 우리가 지진 전에 전기 공급하던 지역에 전력이 들어왔습니다. 미국이나 프랑스 사람들도 그렇게 발 빠르게 대응해서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경영 철학은 '사람'
ESD 직원 315명 중 한국인은 최 대표를 포함해 12명이다. 도미니카인이 80명, 나머지는 아이티인이다. 도미니카에서 ESD는 월급을 가장 많이 주는 회사 중 하나다. 도미니카 대졸자 평균 임금이 500달러 정도인데 ESD의 대졸자 초봉은 월 1000달러다. 1년 5000달러씩 자녀 교육비도 전액 지원한다. 매년 한 번씩 직원 가족 600여명을 휴양지 리조트에 초대해 2박 3일간 쉬게끔 해준다.
―문화 차이가 있을 텐데요.
"아이티인들은 자존심이 대단히 강해요. 아이티인 5명에게 일을 시켰다가 그중 잘하는 사람을 팀장으로 만들면 갑자기 모두가 일을 안 해요. 이곳에선 직급이 올라간다는 얘기는 주인이 된다는 것으로 통하거든요. 자기랑 다를 바 없는 사람이 왜 주인이 되느냐고 반발하죠. '우리'라는 개념도 없어요. 제가 직원들에게 '우리 다 같이 열심히 일해서 멋지게 살아보자'고 말하면 '내가 잘살아야 하니까 열심히 일해라'로 해석하는 식이에요. 그런 문화 차이를 정리하고 승진에 대한 사규를 만드니까 조금씩 마음이 통하는 거 같아요."
―사원 복지에 신경 쓰는 이유가 있습니까.
"사람이 행복하고 신이 나야 열심히 일하고 보람을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인 것이 우선 충족돼야 하죠. 집과 차, 자녀 교육은 돼야 해요. 도미니카는 공교육이 잘 돼있지 않아서 모두 사립학교에 보냅니다. 교육비가 비싸요. 그것을 지원해주자는 것이죠. 리조트 빌리는 것은 2005년부터 쭉 해오는 행사예요. 도미니카 휴양지에 한 번 놀러 가면 1인당 150달러 정도 들어요. 4인 가족이면 한 번에 600달러고 이틀이면 1200달러죠. 갈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가족들을 초대하면 아이들이 정말 좋아해요. 우리 회사에 다니는 아빠와 엄마에 대한 자부심도 생기고요."
한국에서 태어나 도미니카인이 된 최 대표는 "사람의 정체성은 돈 셀 때 드러난다"고 씩 웃더니 왼손으로 지폐 뭉치를 쥐고 오른손 엄지로 한 장씩 빼면서 "하나, 둘, 셋, 넷" 하고 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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