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우리시대 미리엘 주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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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3-01-08 21:40 조회3,1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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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틴은 몽트뢰이유 출신의 고아로 코제트의 엄마다. 코제트를 여관주인인 테나르디에 부부에게 맡겼으나 코제트는 학대당하다가 장 발장에게 구출된다.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2012), 톰 후퍼 감독


I dreamed a dream in time gone by
예전에 난 꿈을 꾸었었지
When hope was high and life worth living
그땐 희망에 찼고 인생은 살아볼 만 했지
I dreamed that love would never die
사랑은 영원하리라 믿었고
I dreamed that God would be forgiving
신은 자비로울 거라 여겼네
But the tigers come at night
하지만 잔혹한 현실은 한밤중에
With their voices soft as thunder
천둥 소리를 내며 들이닥쳤네
-판틴의 “I Dreamed A Dream” 중에서



이 노래는 영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2012)에서 코제트의 엄마 판틴이 부르는 잔혹한 현실이다. 신은 자비로울 거라고 믿었지만, 신이 만든 세계는 가난한 이들에게 너무나 잔인했다. 판틴은 고아 출신으로 파리에서 재봉사로 일하다 불량한 대학생에게 버림받고 고향에서 여공 노릇을 하다 끝내는 매춘부가 되어 마들렌느(장 발장)의 진료소에서 폐병으로 죽은 불행한 여인이다. 그러나 판틴이 경험한 세계는 장 발장이 경험한 세계와 다르지 않았다. 가난과 굶주림 때문에 한 조각의 빵을 훔치다가 붙잡혀 툴롱의 감옥에서 19년 동안 갇혀있었던 불행한 남자가 그였다. 이들이 희망처럼 보살피려던 아이가 코제트와 그의 연인인 청년혁명가 마리우스였다.


소설 <레미제라블>(동서문화사, 2002 중판)은 가석방된 장 발장이 자비로운 몽트뢰이유 쉬르메르 시의 마들렌느 시장으로 시민을 돌보고, 가련한 코제트의 보호자로 살고,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줄 알면서도 마차에 깔린 노인을 구하고, 장 발장으로 오인되어 기소된 이의 결백을 드러내고, 평생 자신을 추적하던 ‘법의 인간’ 자베르 경위마저 결정적인 순간에 구해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첫장에서 샤를르 프랑수와 비앵브뉘 미리엘 주교를 길게 소개한다. 그는 연민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빅톨 위고의 글에서 미리엘 주교에 대한 열쇠를 풀면 장 발장의 세계를 열 수 있다. 그리고 좋은 의미로 미리엘 주교는 한국교회의 주교들에게도 좋은 스승이 되지 않을까 희망한다.


환대받는 죄인 “당신은 내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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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발장을 위기에서 구해준 미리엘 주교는 은촛대마저 내주며 "나는 당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바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그림출처/ <레미제라블>1권, 동서문화사, 2002년)

가석방된 장 발장이 미리엘 주교를 만난 1815년, 주교의 나이는 75세로 디뉴의 주교였다. 장 발장의 통행증에는 “석방된 죄수, 태생은 ...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 ... 19년 동안 징역살이를 했음. 주택침입 절도죄로 5년. 네 번의 탈옥 기도로 14년. 굉장히 위험한 자임”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개만도 못하다’고 말할 정도로 장 발장은 가는 곳마다 멸시받았다. 미리엘 주교가 그를 식탁에 앉혔을 때 장 발장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몹쓸 인간’이라며 오히려 당혹스러워했다. 그때 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신분을 밝히지 않아도 좋았소. 여기는 내 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인의 집이오. 이 문을 들어오는 사람에게 일일이 이름을 묻지 않고, 다만 괴로움이 있는가 없는가를 물어볼 뿐이오.”


주교는 주교관이 ‘내 집이 아니라 당신 집’이라며, 장 발장을 ‘내 형제’라고 불렀다. 주교는 아무런 설교도 훈계도 없이 그의 마음을 다독거려줄 뿐이었다. ‘불쌍한 사람’(레미제라블 Les Miserables)에게 필요한 것은 훈계가 아니라 자비였기 때문이다. 장 발장이 새벽에 여섯 벌의 은그릇을 훔쳐 달아났다가 헌병에게 붙잡혀왔을 때 주교는 “나는 당신에게 은촛대도 주었는데 왜 당신에게 준 그릇이랑 함께 가져가지 않았느냐”며 오히려 장 발장을 변호해 주었다. 주교의 친절과 자비를 평생 잊지 않았던 장 발장은 그 은촛대만은 내내 지니고 다녔다. 그 은촛대가 그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주교는 입고 있던 옷까지도 벗어주었다


미리엘 주교는 1806년 디뉴의 주교로 임명되고 나서, 사흘 만에 자신의 대저택(주교관)을 조그만 뜰이 딸린 낮은 2층건물인 자선병원과 맞바꾸었다. 그는 원장을 불러 말했다. “당신 병원에는 대여섯의 조그만 방에 26명이나 들어있는데, 우리들 쪽은 세 사람이 60명이 들만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당신이 내 집에 와서 살고, 내가 당신 집에 가서 살기로 합시다. 여기가 당신 집입니다.”


주교는 국가에서 1만5천 프랑의 봉급을 받았는데, 자신을 위해서는 1천 프랑밖에 사용하지 않고, 모두 교회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놓았다. 추가로 마차 삯과 교구순회비로 시에서 나오는 3천 프랑은 자선병원의 환자들과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사용했다. 주교는 관할교구의 결혼공시 면제, 결혼식, 영세, 강론, 성체강복식 등을 통해 들어오는 수입을 부자들에게서 되도록 많이 챙겨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인정 있는 부자보다 비참한 이가 늘 많은 법이어서 언제나 빈털터리였다. 그럴 때면 주교는 입고 있던 옷까지도 벗어주었다.


“죄인은 죄를 저지른 자가 아니라 영혼 속에 그늘을 만들어준 자”라고 말했던 주교는 위조지폐 건으로 붙잡힌 어느 불쌍한 남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자는 위조된 돈을 처음으로 쓰다가 붙잡혔는데, 공범을 불지 않았다. 그러자 검사는 꾀를 내어 남자에게 다른 연인이 있다고 쓰인 위조편지를 여자에게 보여줘서, 질투에 불타게 된 여자에게서 공범인 남자를 자백 받았다. 이 남녀가 중죄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주교가 물었다. “그러면 검사는 어디서 재판을 받습니까?”


“의사의 문은 닫혀 있지 않고
사제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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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의 개인생활은 단순하면서 장엄했다. 그는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짧은 시간 깊이 잠들었다. 아침미사가 끝나면 집에서 호밀빵에 우유를 받아 마시고 업무를 시작했다. 주교관의 서기와 본당사제들을 만나고, 수도회를 감독하고, 교리문답과 기도서를 살피고, 강론을 인가하고, 사제들과 시장 및 읍장 사이를 조절하고, 교서를 쓰고, 바티칸에 행정상의 서신을 띄웠다. 나머지 시간에는 주택 정원의 꽃밭을 가꾸고,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날씨가 좋을 때는 들과 시내를 돌아다니며 오두막집을 곧잘 방문했다.


주교가 모습을 드러내는 곳은 어디나 잔치가 벌어지는 것 같았다. 그가 지나가면 그 언저리는 따스함에 싸이고 빛나는 듯했다. 어린아이와 노인들은 마치 햇빛을 받으려는 듯 주교를 보러 문 밖으로 나왔다. 그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사람들은 그를 축복했다. 그는 발길이 닿는 곳마다 아이들에게 말을 걸고, 그 어머니들에게 미소를 보냈다. 주교는 돈이 있는 동안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찾고, 돈이 떨어지면 부자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교관으로 쓰는 집에는 자물쇠로 채운 방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옛날에는 감옥 문처럼 자물쇠와 빗장이 질러져 있었으나, 주교는 그런 쇠붙이를 모두 떼어 버렸다. 이 문은 밤이나 낮이나 손잡이만으로 닫아놓아서, 지나가는 누구나 언제든 밀기만 하면 열렸다. 주교는 성경의 여백에 이렇게 적었다. “의사의 문은 결코 닫혀 있지 않고, 사제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문단속을 하라고 조언하는 어느 사제에게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 집을 지켜주시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무리 지킨들 헛수고일 따름이오.”


사제의 청빈은 자비의 첫 번째 증거


미리엘 주교는 사제에게, 특히 주교에게 자비의 첫째 증거는 ‘청빈’이라고 여겼다. 빅톨 위고는 이런 주교의 처신에 대해 이렇게 소설에 적었다.


“사치한 생활을 하는 사제는 하나의 모순이다. 사제란 언제나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해야 한다. 노동의 먼지 같은 저 신성한 빈곤을 조금도 갖지 않고 어떻게 밤낮으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갖가지 비탄, 갖가지 불행, 갖가지 궁핍을 어루만질 수 있겠는가? 활활 타는 난로 곁에 있으면서 추위에 떠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용광로에서 쉴 새 없이 일하면서 머리카락이 그을지 않고, 손톱에 때가 끼지 않고, 한 방울의 땀도 흘리지 않고, 한 줌의 재도 얼굴에 묻히지 않는 노동자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 주교는 1811년 노틀담 대성당에서 열린 주교회의에 참석차 파리에 갔다가 어느 신분 높은 동료의 저택에서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괘종시계! 아름다운 양탄자! 화려한 하인들의 제복! 꽤나 번거로우시겠습니다! 원, 나 같은 건 이런 사치를 도저히 생각도 못합니다. 그런 것들이 줄곧 내 귀에 대고 외칠 것 같아서요.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복음적 청빈을 외치는 이를 달가워할 상류사회와 고위성직자는 많지 않았다.


권세 있는 대주교 주변에는 통상 아첨꾼들과 젊은이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대주교가 추기경이든 뭐든 승진할수록, 그의 영달은 주변인들에게 승진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모든 추기경들의 붉은 관이 교황의 3층관을 꿈꾸듯이 사람들은, 성직자들조차 출세를 바란다. 그러니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미리엘 주교와 같은 외로운 노인을 발판으로 삼아 올라서 보려는 마음을 먹지 않는다.


다만 미리엘 주교에게도 옛 소유물 중에서 사치스럽다 할 만한 물건이 한 가지 있었다. 장 발장이 훔쳐갔던 은그릇과 은촛대다. 그러나 벽장에 넣어 두었던 은그릇이 밤새 사라진 것을 처음 발견한 주방의 마글르와르 부인이 “그 놈이 우리 그릇을 훔쳐갔어요!”라고 전하자, 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대체 그 은그릇이 우리 물건이었던가?” 이어 이렇게 전한다. “마글르와르 부인, 내 잘못으로 우리는 오랫동안 그 은그릇을 갖고 있었소.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오. 그런데 그 사나이는 어떤 사람이었소? 가난한 사람임에 틀림없었잖소?”


미리엘 주교 같은 주교는 단지 소설에서만 만날 수 있는 존재일까? 문득, ‘요한 23세’란 이름으로 교황좌에 오르기 전 베네치아에서 사공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론칼리 추기경을 보는 듯하고, 광산촌에서 용기 없는 자신을 탓했던 김수환 추기경을 다시 만난 듯 했다. 잔혹한 현실에서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말을 제단에서 선포할 뿐 아니라 삶을 통해 보여주는 우리시대의 미리엘 주교를 기다린다. 성탄이 지나고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면서 새해가 시작되었다. 다시 판틴이 꾸었던 꿈을 이어서 간직하고 싶다. 

*참고:  빅톨 위고, <레미제라블>, 동서문화사, 2002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한상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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