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조선을 바라본 ‘긍정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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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07-09 09:47 조회4,8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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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조선인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고 있다.
그렙스트 기자는 “조선인은 품위있는 태도를 가졌다”고 했다.

 
 
‘유쾌한 평등주의자’ 스웨덴기자 아손 그렙스트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빨리 배우고 믿을 만하다”
 
 
우리는 구한말 조선(인)을 바라본 서구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미개함, 더러움, 게으름 같은 부정적인 표현들에 익숙하다. 물론 당시 조선에 그런 표현이 어울리는 현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과 조선인의 긍정적인 면모를 찾아낸 눈 밝은 서구인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모르고 있었다. 조선의 부정적인 면이 두드러진 데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주도면밀한 식민 정책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

작가 박수영 씨(48)는 이렇게 역사의 그늘에 묻힌 조선의 긍정적 측면을 양지로 끌어내고자 한다. 그는 앞으로 활기 명랑 끈기 용기 지혜 등의 말을 써서 조선과 조선인을 기술한 서구인의 시선을 하나씩 관찰해 나갈 것이다. 박 씨는 “역사의 약자였던 조선인의 명예를 회복했으면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긍정적 정체성을 찾는 ‘유쾌한 역사학’의 길로 들어서 보자.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는 1904년 부산포에 내렸다. 그의 가방에는 다양한 색깔의 천 조각과 ‘면직의류회사 대표’ 명함이 들어 있었다. 사실 그렙스트는 러일전쟁 취재차 일본에 머물다 실제 전투 현장도 살펴보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이라는 조선인도 보고 싶은 충동을 못 이겨 밀입국한 것이었다. 의류회사 대표 명함은 외신기자의 전투 현장 접근을 철저히 봉쇄한 일본 정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그가 생각해낸 위장술이었다.

제각기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억세게 생긴 조선 남성들이 부두에 내린 그렙스트를 쳐다봤다. 그들은 푸른 눈의 이역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있었지만 ‘온화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는 조선인을 일본인과 비교해 이렇게 묘사했다.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있을 정도로 키가 컸다. 또한 신체가 잘 발달되었고 균형이 잡혔다. 태도는 자연스럽고 여유가 있었다. 똑바로 추켜올린 얼굴은 거침없고 당당했다. 걸음걸이는 힘차 보였으며 의식적으로 점잔을 빼는 것 같았다. 비굴하게 벌벌 기고 과장되게 예의를 차리는 일본인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몸놀림과 태도였다.”

○ 과장된 일본인, 자연스러운 조선인
 
구한말 서양인이 쓴 조선에 대한 글에는 ‘조선인은 일본인과 비교해 버릇이 없다’는 식의 묘사가 많았다. 1882년 조선을 여행한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조선인의 지나친 호기심과 무례함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기술했다. 반면 일본인은 한결같이 예의 바르다고 적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렙스트는 그런 일본인의 태도가 과장됐다고 봤고, 조선인은 자연스러웠다고 이해했다.

그렙스트는 조선인을 만나 대화하고 관찰하기를 즐겼다. 특히 통역이자 가이드 역할을 한 윤산갈은 중요한 동반자였다. 이 조선인 청년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 선교사들에게서 서구식 교육을 받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구 여행자와 현지인 안내자 사이에서 흔히 드러나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아니라 친구와 같은 우정을 나눴다. 그렙스트는 윤산갈이 가고자 하는 곳을 따라가기도 하고, 죄수에게 사형을 집행하는 현장같이 자신이 가보고 싶은 데를 같이 가달라며 애원하기도 했다.

윤산갈을 꼬드겨서 간 감옥에서 그렙스트는 서양인을 신기하게 보는 간수를 만났다. 간수는 스웨덴이라는 나라가 이마에 눈이 하나만 달린 족속이 사는 곳인지, 등에 뿔은 없는지 알아본다며 그렙스트의 몸을 만져봤다. 그렙스트는 ‘난생 처음 당해보는 괴상망측한 신체검사’에 화를 내기는커녕 크게 웃음을 지었다. 현지인들의 호기심을 무례하다고 보지 않고, 자신이 조선인을 관찰하듯 조선인도 똑같이 자신을 관찰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본 것이다.

○ 인식에 변화를 준 잠행

그렙스트는 조선을 ‘정신적으로 정체된 나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외국인들을 만나보고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서울에서 전차선로를 운영하는 한미(韓美)합작회사의 미국인 담당자가 그에게 말했다.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일을 더 빨리 배우며, 그들이 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조선의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프랑스계 기독교 학교의 피에르도 말했다. “조선인들은 머리가 명석합니다. 이들이 동면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탐구심으로 불타오를 거예요.”

조선에서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보면서 일본에 대한 그렙스트의 인식도 변했다. 그는 빈약한 병기를 든 조선군이 막강한 화력을 지닌 일본군에 패퇴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했으며, 토지를 빼앗긴 양민들이 이에 저항하다 일본군에 학살당한 현장에도 가보았다.

그는 고백했다. “일본에서는 모든 사물의 외면이 매혹적으로 아름다워서 그 이면을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는데… 이곳에서 비로소 일본의 잔인함과 냉정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세계가 ‘일본은 서구식으로 개화된 나라’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비록 일본인이 빠른 두뇌회전과 명석함을 무기로 힘을 과시하고는 있지만, 서구 문명이 도달한 지점까지 일본이 따라오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당시 그렙스트처럼 조선의 진면목을 살펴보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가련한 조선이 궁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기는커녕 조선이 처한 절박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조차 드물었다. 조선은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역사에서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렙스트는 1912년 고국에서 쓴 책 ‘조선에서’(‘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책과 함께·2005)에서 이처럼 약자인 조선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희생시키는 강자 위주의 역사에 저항하려 했다.

“역사의 바퀴는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굴러왔다. 강자는 내키는 대로 별의별 일을 다 하는 반면 약자는 자신이 내지르는 비명의 메아리조차 듣지 못한 채 스러져간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자는 거의 없었다.

박수영 건국대 강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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