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계자 주목받다 밀려 해외로 전전 ‘비운의 황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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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17-02-14 12:41 조회5,21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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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美 망명으로 입지 흔들… 2001년 日밀입국 시도 이후 완전히 김정일 눈밖에 나
말레이시아에서 13일 피살된 김정남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남이자 유력한 후계자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김 국방위원장의 눈 밖에 나면서 후계 구도에서 밀려났다. 이후 이복동생인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집권하면서 오랜 기간 해외를 떠돌아야 했다.
김정남은 1971년 5월 10일 평양에서 김 국방위원장과 배우 출신 두 번째 부인 성혜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 국방위원장은 이미 결혼해서 딸까지 두고 있었던 성혜림을 강제 이혼시키고 동거해 김정남을 낳았다. 때문에 김일성이나 북한의 간부들에게 자신의 아들로 내세우기 어려웠고, 김정남은 숨겨진 아들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 모친인 성혜림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오래 투병한 탓에 고모인 김경희의 보살핌 속에 자랐다. 이런 인연으로 김경희·장성택 부부는 김정남의 후견인 역할을 해왔다. 2013년 장성택 숙청의 단초 중 하나가 장성택이 김정남을 후계자로 밀었기 때문이라는 관측도 있다.
김정남은 1980년대 모스크바의 프랑스 학교와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납치에 대한 우려로 모스크바로 전학 갔다가 다시 제네바로 편입하는 등 10대 후반까지 해외에 체류하다 귀국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김정남의 유학은 그를 국제감각이 있는 지도자로 키우고자 하는 의도에서 결정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이후 제네바 대학에 진학해 정치학을 전공했다는 주장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했다.
김정남은 만 24세이던 1995년 인민군 대장 계급을 받는 등 한때 후계전선에서 앞서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듬해 이모인 성혜랑이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고위층 자녀들에게 “내가 후계자가 된다면 북한은 개혁·개방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발언한 사실이 알려져 아버지 김 국방위원장이 그를 후계구도에서 배제했다는 설도 있다. 2001년 4월에는 도미니카공화국 위조 여권으로 일본 밀입국을 시도하다 적발돼 중국으로 추방되면서 ‘후계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났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김정남은 이후 주로 중국과 마카오 등지에 머물면서 김 국방위원장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는 무기 수출 총책 역할을 했다. 아버지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김정남은 2009년 1월 김정은 위원장이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 북한 땅을 밟지 못한 채 ‘국제 미아’로 전락했다. 김 위원장이 김정일 사망 후 정권을 장악하자 김정남에 대한 지원도 사실상 끊었다. 일부 언론은 김정남이 주로 말레이시아에 체류하면서 내연녀가 있는 싱가포르를 오갔다고 전했다. 첫째 부인 신정희와 둘째 부인 이혜경 사이에 아들 김한솔과 딸 김솔희를 얻었으나 이들과는 따로 생활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정남은 김정은 후계구도가 완성되자 2010년 외국 언론에 ‘3대 세습에 반대한다’는 등 북한 체제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돌출행동을 일삼아 북한 당국의 집중 감시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던 고모부 장성택으로부터 “말조심하라”는 충고를 받았을 정도였다. 그간 해외 목격담과 함께 종종 ‘암살설’이 나오는 등 아버지 생전에 비해 신변이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은 꾸준히 제기됐었다.
김정남은 1971년 5월 10일 평양에서 김 국방위원장과 배우 출신 두 번째 부인 성혜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 국방위원장은 이미 결혼해서 딸까지 두고 있었던 성혜림을 강제 이혼시키고 동거해 김정남을 낳았다. 때문에 김일성이나 북한의 간부들에게 자신의 아들로 내세우기 어려웠고, 김정남은 숨겨진 아들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 모친인 성혜림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오래 투병한 탓에 고모인 김경희의 보살핌 속에 자랐다. 이런 인연으로 김경희·장성택 부부는 김정남의 후견인 역할을 해왔다. 2013년 장성택 숙청의 단초 중 하나가 장성택이 김정남을 후계자로 밀었기 때문이라는 관측도 있다.
김정남은 1980년대 모스크바의 프랑스 학교와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납치에 대한 우려로 모스크바로 전학 갔다가 다시 제네바로 편입하는 등 10대 후반까지 해외에 체류하다 귀국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김정남의 유학은 그를 국제감각이 있는 지도자로 키우고자 하는 의도에서 결정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이후 제네바 대학에 진학해 정치학을 전공했다는 주장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했다.
김정남은 만 24세이던 1995년 인민군 대장 계급을 받는 등 한때 후계전선에서 앞서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듬해 이모인 성혜랑이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고위층 자녀들에게 “내가 후계자가 된다면 북한은 개혁·개방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발언한 사실이 알려져 아버지 김 국방위원장이 그를 후계구도에서 배제했다는 설도 있다. 2001년 4월에는 도미니카공화국 위조 여권으로 일본 밀입국을 시도하다 적발돼 중국으로 추방되면서 ‘후계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났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김정남은 이후 주로 중국과 마카오 등지에 머물면서 김 국방위원장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는 무기 수출 총책 역할을 했다. 아버지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김정남은 2009년 1월 김정은 위원장이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 북한 땅을 밟지 못한 채 ‘국제 미아’로 전락했다. 김 위원장이 김정일 사망 후 정권을 장악하자 김정남에 대한 지원도 사실상 끊었다. 일부 언론은 김정남이 주로 말레이시아에 체류하면서 내연녀가 있는 싱가포르를 오갔다고 전했다. 첫째 부인 신정희와 둘째 부인 이혜경 사이에 아들 김한솔과 딸 김솔희를 얻었으나 이들과는 따로 생활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정남은 김정은 후계구도가 완성되자 2010년 외국 언론에 ‘3대 세습에 반대한다’는 등 북한 체제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돌출행동을 일삼아 북한 당국의 집중 감시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던 고모부 장성택으로부터 “말조심하라”는 충고를 받았을 정도였다. 그간 해외 목격담과 함께 종종 ‘암살설’이 나오는 등 아버지 생전에 비해 신변이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은 꾸준히 제기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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