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악수에도 놀랐던 그들, 문명(文明)을 동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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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09-12-04 14:01 조회4,9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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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9월 미국에 도착한 조선의 첫 외교사절 보빙사 일행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앞줄 왼쪽부터 부사 홍영식, 정사 민영익, 종사 관 서광범, 미국인 로웰. 뒷줄 왼쪽부터 무관 현흥택 최경석, 수행원 유길준 고영철 변수.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이승원 지음|휴머니스트|340쪽|1만6000원

"모든 문무고관들이 자기의 부녀를 거느리고 와서 각국인 남녀와 어울려 둘씩 둘씩 서로 껴안고 밤새도록 춤을 추었다. 그 광경은 비단 같은 꽃떨기 속에서 새와 짐승들이 떼 지어 희롱하는 것 같았다."

1885년 3월 9일 일본 최대의 서양식 사교장 로쿠메이칸(鹿鳴館)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한 조선 선비 박대양(朴戴陽)은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대경실색했다. 일본으로 도망한 갑신정변의 '역적'들을 잡아오라는 고종의 엄명에 따라 일본에 왔다가 일본 육군경(陸軍卿) 오야마 이와오(大山巖)의 초대로 연회에 참석했던 그는 이 자리에서 '한 아름다운 여인'이 악수를 청하자 어쩔 줄을 몰랐다. "일찍이 창부(娼婦)나 주모(酒母)의 손도 잡아본 일이 없는데, 갑자기 이런 경우를 당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96 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축하사절 민영환(閔泳煥)을 수행한 역관(譯官) 김득련도 서양의 해괴한 풍습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처음으로 숙녀들 사이에서 자리를 잡았다. 외국의 풍습에 따라 숙녀들은 신사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는다는 것을 여기서 꼭 설명해야 되겠다. 게다가 외국의 풍습은 놀랍게도 숙녀들이 밥상 앞에서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10년 사이에 서양을 바라보는 조선 지식인의 시선은 상당히 바뀌었다. 1885년 박대양은 "남녀의 차례가 없고 존비(尊卑)가 법이 없음이 이와 같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매우 더러워할 만하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10년 뒤 김득련은 나이프와 포크를 쓰는 식사를 어색해하고 커피에 소금을 타는 실수를 연발하면서도 서양인들을 흉내 내려 애썼다. "잔인한 시선들이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았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난관을 극복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타인을 모방하는 것이라는 점을 나는 알고 있었다."

저자(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는 멀게는 100여년 전 한말(韓末)부터 가깝게는 60여년 전 일제 식민지 시대까지 세계를 여행하며 쓴 기행문과 근대소설 등 여러 자료를 통해 일본·만주·상하이·러시아·동남아시아·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 조선 지식인이 접한 세계에 대한 인식을 재구성한다.

이 들 조선 지식인들은 서양의 '문명'에 대해 선망을 가지고 조선의 '야만'에 대해선 수치를 느꼈다. '동양의 런던'으로 불리던 상하이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윤치호는 더럽고 냄새 나는 중국인을 보며 조선인의 미개한 삶을 더욱 부끄럽게 생각했다. "청인(淸人)의 집은 음침하기 측량 없어 일본 사람의 정결하고 명랑한 집에 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의 똥뒷간 같은 집이야 어찌 청인의 2층집에 비하겠는가."

하지만 때로 서양의 '문명'을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한 역관 김득련은 "공연이 끝나자 여덟 살이 될까 말까 한 어린 소녀가 무대 위에 나타났다. 그녀는 노래 부르고, 춤추고, 농담도 하고, 헐떡거렸다. 나는 그 아이가 가여웠다. 저 연약한 아이를 난잡한 군중의 시선 앞에 노출시켜 그녀를 한낱 쇼의 상품으로 만들지 않는가"라고 썼다.

저자는 조선 지식인들이 서양을 닮고 싶어하는 동일화(同一化)의 욕망을 내재하고 있으면서도 서구인이 동양을 재구성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비서구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고 말한다. 동남아시아에 들른 민영환은 "토인은 모두 추하고 더럽고 빛이 검은데, 남녀가 모두 머리를 기르고 발을 벗었다"고 썼다. 반면 그는 "영국 사람은 마음가짐이 정밀하고 일하는 것은 견고하고도 참을성이 있으며 기상은 호걸스럽고 담은 씩씩해서 구라파 여러 나라의 으뜸이 된다"고 극찬했다. 저자는 "(민영환이) 이질적 문화의 차이에 대해서 고민하기보다는 문명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비서구 세계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고 분석한다.

문화상대주의에 입각한 저자의 이런 비판은 도덕적으론 타당하지만 의문도 든다. 조선은 서구의 '근대'와 '문명'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해서 일제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런데 당대 지식인들이 가졌던 '근대'와 '문명'에 대한 열망을 제국주의 시선을 내면화한 잘못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지나친 게 아닐까. "서구식 신교육이 선주민의 육체와 정신을 강탈해간다는 사실을 철저한 문명론자였던 최남선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거나 "(프랑스의) 그 '박애'가 인류애가 아니라 여성을 배제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나혜석의 파리, 프랑스는 또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등의 서술은 후대를 사는 사람의 오만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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