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전화 끊고 집 앞에 뭘 좀 사러 나가는데
우리 아파트 양지 뒤쪽에 노란 개나리 꽃이 보였어.
이렇게 추운데도 노랗게 피어난 거야.
홍아, 때로는 봄에도 눈이 내리고
한겨울 눈발 사이로 샛노란 개나리 꽃이 저렇게 피어나기도 하잖아.
한여름 쨍쨍한 햇살에도 소나기가 퍼붓고,
서리 내리는 가을 한가운데에서도
단풍으로 물들지 못하고 그저 파랗게 얼어 있는
단풍나무가 몇 그루 있는 것처럼,
이 거대한 유기체인 자연조차 제 길을 못 찾아 헤매는데,
하물며 아주 작은 유기체인 인간인 네가
지금 길을 잃은 것 같다고 해서 너무 힘들어하지는 마.
가끔은 하늘도 마음을 못 잡고
비가 오다 개다 우박 뿌리다가 하며 몸부림치는데
작은 심장이 속수무책으로 흔들린다 해도 괴로워하지 마.
사랑 후에 오는 것들 - 공지영
간혹 아침에 눈을 떳을 때
이유 모를 허무감과 슬픔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매일 잠들고 깨어난 공간이
무척이나 낯선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살다보면 원인불명의 외로움에 고개 떨구는 날도 있다.
늘 변함없이 말짱한 상태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매일이 다른 오늘의 날씨처럼 말이다.
슬픈 날도 괜찮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외로움도 괜찮다.
굳이 외롭지 않으려고 경솔하게 누군가를 만나거나
지루한 시간으로 자신을 괴롭히지 않도록 하자.
마음 속에 교차되는 복잡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어찌 모두 이해할 수 있겠는가.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그 이외의 편안함을 원하는 열망이 있다는 뜻도 되므로
우선 그러한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내 안에 나약한 자신이 있다면 그래서 두려운 자신이 있다면
무리하게 숨기지 말도록 하자.
때로 나약해진들 어떻겠는가.
작은 씨앗이 어떻게 꽃이 되는가?
싹이 움트기 전에 반드시 겪어야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어둠과 외로움을 마주하는 두려움.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꽃을 피우는데 꼭 필요한 과정이다.
인애란 / 그대 홀로 있기 두렵거든 중
남으로 가는 기차를 타겠습니다.
더딘 열차에서 노곤한 다리, 두드리는 남루한 사람들과 소주잔을 나누며
지도에도 없는 간이역 풍경들과 눈인사를 나누겠습니다.
급행열차는 먼저 보내도 좋겠습니다.
종착역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자운영이 피고 진 넓은 들을 만날 수 있다면.
들이 끝나기 전, 맨발로 흙을 밟아 보겠습니다.
신발을 벗어들고 천천히, 흙내음에 한참을 젖겠습니다.
쉬엄쉬엄 걷는 길, 그 끝 어디쯤에 주저앉아
혼자 피어있는 동백이며 눈꽃이며
키 작은 민들레의 겨울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봄이 깊기를 기다리라고 이르기도 하겠습니다.
기차가 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봄이 오는 소리에 귀를 열고
해지는 들에서 노을 한 개비를 말아 피우겠습니다.
이제껏 놓지 못한 시간을 방생하겠습니다.
봄이 오기 전,
완행열차를 타고 남으로 가겠습니다.
남녘 어디라도 적당합니다.
김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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