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듯 하지만 실은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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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08-11-13 10:30 조회3,7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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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피식 웃었다.

" 비 피하는 것에는 누구든지 은밀한 추억이 있나봐."

"당신도 있나요?"

"몇가지 있어. 모두 사랑에 관한 것만."

"달콤한 추억? 아니면 쓰라린 추억?"

"지금은 모두 쓰라린 추억이 되었어."

"왜?"

" 왜냐 하면 모두 잃어버린 사랑이니까.

달콤한 추억은 진짜 사랑이 아니야.

너 같은 젊은 남자는 모르겠지만."

"진짜 사랑이 아니라도 좋잖아요.

멋진 과거를 감상할 수 있다면 그 쪽이 좋지요."


야마다 에이미 / 비의 화석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꼭 껴안았다.

유리는 눈을 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가 말하자 유리는 훅 하고 숨을 삼키더니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행복이란 게 뭔지 알아?"

"몰라요."

내가 대답하자 진지한 얼굴을 하고 유리는 말한다.

"바로 이런 거야."

유리는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녀의 눈물을 핥아 주었다.

그녀의 기분이 이해가 갔다.

소중한 사람과 부둥껴안고 새해를 맞는다는 건

진부한 듯 하지만 실은 기적이다


타인의 섹스를 비웃지 마라 / 야마자키 나오코라



어린시절부터 나는 행복이라는 개념을 몰랐다.

행복이라는 말의 뜻을 모르겠다고 하면 어른들은 파랑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린 남매가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결국은 그들의 집에 있는 새가 파랑새란 걸 알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

그것이 행복의 정체인거야, 라고 어른들은 말했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

행복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 살 수 있고,

아직 스무 해 남짓밖에 살지 않았지만

행복보다 소중한 것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것이 뭔지 말로는 할 수 없지만.

앞으로도 그것이 뭔지 모를지 모르지만

그런 것이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아.


무라카미 류 / 와인 한 잔의 진실



참 이상하기도 하지

왜 아픈 사람들이 아픈 사람에게 다가가 사랑이 되는 것일까

자석은 다른 극이 만나야 하나가 되는데

슬픈 손과 손이 만나 서로의 슬픔을 어루만진다

아픈 것들끼리 만나 밀어내지 않는

수학으로는 풀리지 않는 인간이란 색다른 방정식


맹자의 성선설을 다시 읽다 / 서안나



사랑과 믿음, 상당히 어려운 조합이다.

그나마 소망은 뺀다 쳐도,

사랑과 믿음 중 하나만도 제대로 감당하기 힘든 터에

감히 둘을 술목관계로 엮어 사랑을 믿은 적이 있다니.

믿음이 사랑한 적이 있다는 말만큼이나

뭐가 뭔지 모르게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나처럼 겁과 의심이 많고 감정에 인색한 인간이 뭘 믿은 적이 있다고?

인생을 살다 보면 까마득하여

도저히 다가설 수 없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

의외로 손쉽게 실현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때가 오기도 한다.

나 또한 그런 순간에 들렸던 것뿐이다.

더 기막힌 건 앞으로 살다보면

그런 일이 또 찾아오지 말란 법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우산이나 상비약을 챙기듯 미리 대비할 수도 없다.

사랑을 믿는다는 해괴환 경험은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퇴치하거나 예방할 수 없는,

문이 벌컥 열리듯 밖에서 열리는 종류의 체험이니까.

두 손 놓고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니까.


권여선 - 사랑을 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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